필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서사가 아닙니다. 영화는 재현도 아닙니다. 영화는 운동과 시간의 관계를 이미지로 보여주며 우리의 습관적인 인식체계를 흔들어놓는 사유기계입니다. 들뢰즈의 영화론은 “영화에 관한 사색인 이상으로 세계로서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영화에 개입해서 어떤 면에서는 영화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 세계에 관한 사색”(우노 구니이치)입니다. 지금 우리는 헐리웃과 cgv에 완벽하게 포획되어 있습니다. 그들, 거대 미디어 산업은 우리가 봐야 할 영화를 지정하고, 우리가 느껴야 할 감성을 명령합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나보고자 합니다. 영화를 사유한다는 것, 익숙한 사유와 습속을 뒤흔드는 시간 이미지를 통해 삶의 원점에서 다시 질문한다는 것! 가능할까요? 여기 변방, 동네의 작은 배급사 [필름이다 Film Ida]에서 그 실험을 시작합니다.

목요일 영화보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영화후기가 올라오지 않냐고 눈치를 좀 받았습니다.

오늘 신고리5,6호기 승인사태에 즈음한 긴급토론회를 시작하기 전에

스틸라이프의 해석을 둘러싸고 온갖 주장들이 난무했습니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다! 등등..

그러더니.. 화살이 제게로 날아왔지요. 얼른 후기를 올리라고..

그래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말할 자리가 마련되지 않겠냐는 거지요..

스틸라이프에 대해 말하고 싶은 분들.. 후기에 열화와 같은 댓글을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이 영화, 좀 특별했습니다.

먼저 영화제목부터 살펴보지요. 한자제목과 영어제목이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삼협호인(三峽好人)은 산샤의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스틸라이프는 정물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삼협호인이라는 제목은 산샤댐으로 물에 잠기게 된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틸라이프는 그 이야기가 정물화처럼 그려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제목도 제목이지만 영화에는 배경만 같고, 서로 만나지도 않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산샤댐건설로 물에 잠기게 된 도시, 사람들이 쫓겨나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곳에

16년만에 아내와 딸의 행방을 묻는, 허름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달랑 주소 하나 들고 찾아옵니다. 

아내의 주소가 물 속에 잠겼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곳저곳을 헤매며 아내와 딸을 찾으러 다닙니다.

그 사내의 이야기가 주욱 이어지더니

돌연 다른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된 남편을 찾으러 온 여인입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 온 그곳은 과거의 흔적들이 물속에 잠기거나

잠기게 될 예정인 곳입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16년의 거리(사내의 시간) 혹은 2년의 단절(여인의 시간)이 있는 곳, 

그들은 그 거리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절을 확인하게 되는 것일까요.


사내는 고향땅에서는 광부였고, 삼협에서는 건물을 해체하는 노가다일을 합니다.

영화가 끝나도록 그는 런닝셔츠를 입거나, 

웃통을 벗고 팬티 한 장 걸친, 남쪽지방의 날것 그대로의 중국인다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살던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거나 떠돌이 노동자의 형상이지요.

그러나 핸드폰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젊은이는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대중스타의 말투와 제스처를 흉내냅니다.

양자강과 삼협의 풍경은 거대하고 아름답지만 그들의 삶은 비루하고 궁색하기만 합니다.


남편을 찾아 온 여인은 직업이 간호사이고,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의 친구를 통해 남편의 행적을 수소문합니다.

남편의 친구는 물에 잠기게 될 곳에서 유적발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몰지구에서의 해체와 발굴, 그 모순과 역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가 찾는 과거의 흔적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물속에 잠겨 사라져 가는 2000년된 도시와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

그리고 발굴되어  박물관에 모셔지는 유물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결국 그녀는 남편을 만납니다.

그녀의 남편은 건설회사의 비즈니스로, 손님 접대로 눈코뜰새없이 바쁩니다. 

돈깨나 만지는 사람의 형상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지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2000년된 도시가 사라져가는 곳에서 또 현대적인 교량 건설작업이 한창입니다.

그 사이에서 결국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2년의 단절과 불통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는 거기에 남고, 그녀는 양자강의 유람선을 타고 그곳을 떠나 상해로 향하지요.


사내는 16년만에 아내를 만납니다. 

그는 딸이 더 남쪽 땅인 광저우에 돈벌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요.

그리고 돈이 있어야 아내를 데려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는 돈을 벌어 아내를 데려가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는 위험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광부일이 있으니까요.

건물해체일을 하던 농민공들은 그 일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를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아내를 찾아온 노동자인 사내와 남편을 찾아온 간호사인 여인은 만나지 않습니다.

아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말을 하는, 다른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들의 삶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2006년의 중국은 사회주의 사회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일까요.


영화는 네 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집니다.

담배, 술, 차, 사탕.. 이 제목은 어쩌면 네 개의 정물화의 이름일 수도 있고,

네 쪽 병풍의 각 쪽의 그림의 제목일 수도 있습니다.

삼협호인들의 삶의 작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이고, 

그들이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부여하는 어떤 의미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배, 술, 차, 사탕, 그것은 중국인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입니다.

그 사물들은 그저 그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평범한 기호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이 정물들에 카메라의 시선을 들이대는 듯하다가

카메라는 점점 더 넓게 그 정물들 주위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내가 본 영화, 스틸라이프가 어떻더라고 말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어쨌다는 거지? 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이야?

내가 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이름해야 할지 모르는 이상한 장면들이 중간에 갑자기 끼어 듭니다.

어두운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유에프오, 그리고 로켓처럼 돌연 하늘로  치솟는 건물,

시지프스의 노동과 같은 망치질로 해체되는 건물들 사이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현대적 해체공법으로 풀썩 주저앉는 건물의 모습까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장대 하나에 의지해서 외줄을 타는 어떤 사람의 실루엣.

내가 본 것과 내가 연결하는 이야기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상한 장면을 떠올리다보니 이런 의문이 듭니다.

내가 연결해 낸  이야기, 그 스토리는 맞는 것일까. 스토리야말로 영화적 허구가 아닐까.

오히려 정물화와 같은 장면들 만이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해체와 발굴, 파괴와 건설, 과거와 현재, 만남과 헤어짐, 소통과 단절,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그런 것들 외에

이 영화는 순간과 지속에 대해서, 장면과 스토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영화를 통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요?

두서없는 생각을 연결하며 후기를 쓰다보니

습관처럼 스토리를 꿰어 맞추거나 인과를 이어가려고 머리를 굴리거나 분석하려 하기 보다

각각의 장면 하나 하나에, 카메라가 비추는 그림들에 더 깊이 몰입하면서

다른 영화적 경험에 빠져들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족: 

<필름이다> 덕분에 아주 특별한 영화를 한 편도 아니고 네 편이나 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특별 큐레이터 정옥샘의 해설이 있어 더 풍성했던 <혁명과 시간> 화어권 특집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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