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청년

고은

  20대의 사랑이 자유로만 점칠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가장 눈에 띄는, 쉽게 포착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오늘날은 '자유'의 시대잖아요.


  섹스와 연애를 가시적인 담론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는 선생님의 말을 보면서 좀 의아했어요. 선생님이 던지셨던 질문들은 (불행하게도)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고 (거기에다 뭔가 더 달라붙었고), 오히려 더 심하게 이제 이런 일은 개개인이 해결해야만하는 문제가 되어버렸다고도 생각해요. 그리고 어디서나 그렇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에게 에로틱과 야성과 감성은 뭘 의미하는 걸까, 궁금해졌어요. 고미숙쌤의 연애 얘기 들을 때도 느끼는 거지만, 이건 공동체와 함께 갈 수 있는 걸까?


  물론 연애에 있어서 자유로 점칠된 부분들이 있고, 이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만의 사랑의 형식을 만들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젊었을 때와 다르게 지금은 이론으로 자신의 삶을 중무장시키지 않았을 뿐이지, 친말한 관계에 있어서는 누구나 사회의 룰에서 벗어나기가, 습속을 바꾸기가어렵지 않나요? 오래 걸리는 작업이 아닌가요?

   저는 이악물고 똑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거리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모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선생님과 함께 고민을 나눴던 친구들 정도의 사람들은) 각자의 삶과 사랑에서 고분고투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다듬는 이론적인 작업이 '자유'의 담론과 맞물려있을 뿐이지, 여기서 '자율'의 씨앗을 충분히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오히려 저는 선생님이 어떻게 사랑할래?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적으로 4~50대 중심의 인문학 공동체에서 이런 영역은 드러나기 어렵잖아요. 커뮤니티에서는 늘 청년들의 연애사가 파다하게 퍼지는데, 어디서 (제 얘기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소문을 듣다보면 그 사람의 맥락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가쉽처럼 떠든다고 느껴져요. 사실 커뮤니티의 20대들은 대부분 그렇게 느끼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이것이 20대의 연애를 이해하는 방식처럼 느껴졌어요. 루쉰이 하고 조르바가 하면 로멘틱하고 야성과 감성이 넘치는 일이지만 공동체에서 우리가 하면...?


  루쉰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지금 우리가 오래 걸리는 일을 당장 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실책의 사유가 될리가 없을 것같고, 같은 패턴 안에서 눈물 콧물 다 빼가면서 겨우 손톱만큼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애쓰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ps. 그리고 20대들의 연애가 정말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시는지도 좀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