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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 ]⑥ 바보야, 문제는 정치라니까 글 : 문탁 “지난 광우병 사태에 이어 원전 건설 중단과 관련해 비과학적 담론이 횡행해도 이를 필터링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21세기 기술융합시대에 맞는 교육이 부족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는 “원자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인에게 핵분열과 핵융합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지난 7월14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중 일부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미국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따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핵공학과 연구교수 등을 지냈으며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정근모씨다. 난 이 기사를 읽고 한편으로 ‘뭐 이런 오만방자한 인간이 있어?’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핵분열과 핵융합의 차이?’ ‘그게 뭐지?’라는 궁금함/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핵분열과 핵융합의 차이를 모르는 나는, 순간적이었지만 ‘쫄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의 어느 시점으로 느닷없이 타임슬립했다. 당시 물리선생님은 ‘이런 변두리 고등학교에 있을 실력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는데 실력이 출중해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시험문제를 늘 어렵게 냈다. 25문제, 100점 만점의 물리시험에서 우리 대부분의 점수는 20점 내외였고, 4점, 8점짜리도 수두룩했다. 게다가 그 물리선생은 매번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때렸다. 난 이과(理科)였고 화학과 생물에서 발군의 실력을 선보였지만 물리라는 ‘넘사벽’ 앞에서는 늘 주눅 들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결국 예비고사를 며칠 앞두고 전격적으로 문과(文科)로 전향했다. 난 과학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운동권이 되고 운동권이 되자마자 사회주의자가 된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술집에서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며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하루는 선배가 물었다. “공산주의가 뭐니?” 난 자유, 평등, 정의, 인권, 박애 같은 단어들을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읊조렸는데,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선배는 “공산주의는 과학이야!”라는 칼 같은 한 문장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과학에서 도망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자연적 힘(물리)이 아니라 사회적 힘(정치)을 연구해야 했고 증기기관의 동역학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기계의 동역학법칙을 파악해야 했다. 과학은 힘이 셌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과학에 대한 공포/경배의 이중적 감정 (그런데 이건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에서 벗어난 것은 석사 때였다. 난 페미니스트 페다고지(feminist pedagogy)에 대해 논문을 썼는데 그 과정에서 과학/지식이 중립적인 게 아니라 젠더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의 경험과 삶을 이론화하려는 여성주의 인식론을 배움으로써 과학=실증주의=자율적 담론이라는 상식과 철저히 결별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하여 나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였던 아버지가 사 오신 오븐을 줄곧 도마를 말리거나 심지어 우리들 실내화를 말리는 용도로 밖에는 사용할 줄 몰랐던 어머니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과학기술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 아니라 삶이 고단했을 뿐이었다. 삶의 맥락과 무관한 중립적인 오븐은, 없다^^ 여성주의자들처럼 대부분의 인류학자 역시 과학적 사유=보편적 사유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신화적 사유는 과학적 사유만큼이나 “어느 시대엔가 당시 세계에 꼭 들어맞고, 그 세계의 여러 면을 적절하게 설명한다.”(레비스트로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p118) 살린스는 원시사회가 매우 풍요로웠다고 말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구사한 기술의 단순함 때문이라고 한다. (살린스, 『석기시대경제학』, p39) 몇 개의 부싯돌과 가죽 자루에 불과했던 그들의 기술수준은 과학적 기술에 못 미치는 원시적 기술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태도와 완벽하게 조응되는 적절한 기술이다. 비가 오기 전에는 꼭 다리가 쑤시는 할머니 몸의 일기예보(lay knowledge)가 40% 정도의 적중률 밖에 갖지 못하는 값비싼 기상위성의 일기예보(scientific knowledge)보다 하찮게 취급받을 이유는 없다. 부시맨의 초가집(local knowledge)은 어떤 점에서는 핵발전소(scientific knowledge)만큼이나 과학적이다. “세계원자력계의 석학”이라고 불린다는 위 기사의 주인공을 비롯하여 소위 원자력계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절차상의 문제제기인데,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과학기술의 문제를 정치논리로 해결하려한다고 비판한다. 원자력 같은 고도의 과학기술적 문제를 전문가가 아닌 일반시민이 결정하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원전 안전성과 관련된 입장인데, 이들은 원전의 위험이 괴담수준으로 부풀려져 있으며 혹시 다소간의 위험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은 탈핵이 아니라 원자력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탈핵(脫核)이 아니라 안핵(安核)”이 그들의 슬로건이다. 일단 두 번째 문제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광우병이든 원자력이든 위험이 과장되어 거의 괴담(=가짜뉴스) 수준이라는 그들 주장의 근거는 수학적 확률이다. 예를 들어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고 인간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높게 잡으면 수천분의 일, 적게 잡으면 수천 만분의 일이라고 한다. 수천 만분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인 800만분의 1,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인 100만분의 1보다 훨씬 더 적은 확률이다. 광우병 파동 당시 어떤 공무원은 미국산 수입소고기를 먹고 죽을 확률은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하고 환호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과 같다고 하면서 비아냥거렸었다. 그들이 보기에 시민단체와 일부 언론은 무책임한 선동가들이고 국민들은 무지몽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1969년에 미국의 엔지니어 C. 스타는 위험은 확률로 계산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예를 들어 스키를 타다 죽을 확률이 원자력 발전소 옆에 살다가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더 높은데도 사람들은 스키를 기꺼이 즐기고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해서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위험을 확률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재앙의 정도, 통제 가능성, 형평성, 후속세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총체적으로 지각한다.” 따라서 위험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고 “불확실성의 시대에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생존본능’ 같은 것”이다. (홍성욱,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p161) 그러니 위험을 확률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무지하거나 아니면 꼼수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이제 첫 번째 문제를 검토해보자. 과학에 대한 전문가주의는 자연/사회, 과학/정치를 분리하고 자연을 (사회와 무관한) 객관적 실체로, 과학을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중립적 지식으로 간주하는 전형적인 서구의 과학주의적 태도를 반영한다. 그러나 현재 서구 지성계에서 가장 핫(hot)하다는 브뤼노 라투르는 자연과 사회는 결코 분리된 적이 없으며 (그 점에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과학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잘라 말한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과학이 또 다른 정치라는 것은 그들이 폴리프로세서라든가, 거대한 원자력 산업에서 이권을 나눠먹고 있는 폐쇄적인 원전마피아라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타락과 부정의(不正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의 문제이다. 그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의 군복무시절에 인류학을 접하고 현장연구의 방법에 대해 익히게 되었는데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 다소 엉뚱한 질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만약 코트디부아르 농부에 대한 연구에서 사용된 현장연구방법을 일급 과학자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결국 그는 실험실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 돌입했고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을 ‘과학인류학’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침내 과학과 기술의 본성이 보다 크고 강한 연결망구축의 산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적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거시세계를 미시세계(실험실)로 번역하고, 그 미시세계(실험실)에서 인간(과학자, 연구자, 보조 연구자 기타 등등)과 사물(실험용 쥐, 슈퍼컴퓨터, 수학적 시뮬레이션의 출력 용지, 각종 시약 등등)의 연결을 거쳐, 또 다시 이런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번역되는 복잡한 행위자들의 연결망을 통해 생산/제조된다. 바로 그 유명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다. ANT에서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들의 근본적 구별은 없다. 인간과 텍스트와 기계는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동등하다. (이를 ‘일반화된 대칭성’이라고 부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투르의 과학인류학은 다른 말로 대칭성 인류학이라고도 불리는데, 바로 나카자와 신이치가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작업도 ‘대칭성 인류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한 이 행위자들은 각 단계마다 서로 탐색하고 조정하고 선택하면서 연결망을 구축한다. 라투르는 이런 탐색과 조정과 선택을 통해 동맹을 구축하는 과정을 바로 ‘정치’ 라고 부른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지구적 생태위기는 우리가 기술과학을 통해 아무런 규제나 성찰 없이 양산해낸 인간-사물의 하이브리드적 결합때문에 초래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결코 자연/사회, 과학/정치를 구분하는 근대적 인식론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당연히 그것에 바탕을 둔 현실정치(Realpolitik)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라투르의 대안은? 새로운 ‘사물정치(Dingpolitik)’의 구성이다. 인간만 아니라 사물들도 의회를 구성하고 자신의 대표를 파견해야 한다는 것. 인간과 사물이 지금과는 다른 조정, 협상, 선택을 통해 ‘공동세계’를 재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절차는 곧 끝나지만, 라투르 식으로 말해 ‘비근대헌법’(좋은 공동세계)을 새로 구성하려는, 사람과 사물의 새로운 연결망을 구축하려는 생태정치학은 끝나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괴담’에 쫄지도 말고, ‘자연’이라는 ‘환상’에 도취되지도 말고 미세먼지, 방사능과 협상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여전히 정치, 새로운 정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