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강독

반장님이 돌아올 날이 가까워 오고 있어요. 혼나지 않으려면 후기 수정 얼른 얼른 올립시다~~ㅋㅋ


야전과 영원390~391/요요

 

ひそか[··] [ダナ] 가만히·몰래 함.(=こっそり)

きょよう [許容]

きひ [忌避]

へいたん [兵站]

じゅうじゅん [従順]

けいもう [啓蒙]

にせよ [연어] 특히, 예외로서 그것만 들 이유가 없음을 나타냄; (한다) 해도; 하든 말...

ひんぱん [頻繁]

まなざし[眼差] 눈길; 시선; 눈의 표정

じょうほ [譲歩]

もちいる[いる]

たましい [·]

けいじじょうがく [形而上学]

ずだぶくろ[頭陀袋·首陀袋]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헐렁한 주머니.

はだし [·裸足]

つえ []

そっちょく [率直·卒直]

まずしい[しい]

ほうろう [放浪]

ものごい[ごい·物乞] 구걸

ばいかい [媒介]

---------------

그들은 슬며시 거기에서 필연적 관계를 보고 있다고 말해도 좋고, 아마 거기에 유일한 관계를 전제하는 것만이 현상학이나 해석학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원칙적으로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령 감옥의 탄생에서도 그는 18세기에서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어긋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말해지는 수준에서는 자연 상태의 투쟁을 기피하는 원시계약에 의한, 사회계약에 의한, 주권의 사회체 건설의 꿈이 있었다. 다른 한편, 규율권력의 기술가들은 사회 전체로 넓힌 전술과 병참의 전선을, ‘시각성을 띤 감시의 권력을 열었던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원시적인 계약이 아니라 끝이 없는 강제, 기본적 인권이 아니라 무한히 발전하는 조련, 일반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인 순종이었다. 18세기에 그것은 말해진 사회계약과 감시하는 규율의 병존이다. ‘자유를 발견한 계몽은 규율도 발명한 것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푸코는 필연적인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사이의 차이의 어긋남의 확인, 이 같은 행동은 푸코에게 때로 명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해도 자주 반복되므로, 그것은 초기의 광기의 역사의 광기를 둘러싼 담론의 분석이나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죽음에 대한 의학적 시선의 분석 이래 오랫동안 그 논지로 회귀하였다. 질 들뢰즈는 가시적인 것과 언표가능한 것 사이에 처음부터 본성상의 차이가 있다’,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사이에는 어떤 틈, 어떤 분리가 있다’, 그 사이에는 전체화하는 공통의 형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치도 일대일 대응도’ ‘동형성도없다, 라고 차례로 말하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저 들뢰즈 조차 푸코에게서 가시성의 독립성을 강조할 때에는 항상 양보절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확실히 푸코에게는 언표나 담론이 우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가시성의 수준의 독립성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푸코의 독자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혼의 형이상학의 틀 안에서 다종다양한 생존의 문체론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을 명쾌하게 지적하는 이 곳에서, 푸코는 오해의 여지없이 가시성의 수준, 즉 이 분석의 레벨에서 생존의 문체론의 수준의 확고한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야말로 푸코는 키니코스학파를 논하기 시작한다. 키니코스학파는 원래 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없이 분리되어 있어야 하는 진실을 말하는것과 삶의 양식을 어떤 특수한 형태로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묘사한 것처럼 헐렁한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고, 맨발이고, 그리고 지팡이를 짚는다. 그 가시적인 모습으로 파르헤지아를 행한다. 즉 진실을 말한다. 솔직히 기이하다고 할 정도로. 파르헤지아와 지팡이는 이처럼 일체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키니코스학파는 파르헤지아를 사용하고, 그리고 지팡이를 짚는 것입니다.’ ‘삶의 양식(지팡이, 주머니, 가난, 방랑, 구걸)은 저 파르헤지아와 진실을 말하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명확한 역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키니코스학파는 삶의 양태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결합된 철학의 형식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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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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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띠우

2017.11.04
22:55:52
(*.126.164.135)

p388~390 단어 띠우

 

しんちょう [慎重]신중

りゅうほ [留保]유보

よげんしゃ [預言者]예언자

けんじゃ [賢者] 현자

はいぶん [配分] 배분

パレーシア 고대 그리스어인 파레시아는 푸코의 후기 사유 핵심 개념으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비판적 태도를 뜻한다

せつごう [接合]

しゅうよう [修養]수양

たんれん [鍛練·鍛錬]단련; 연마

じょうか [浄化]정화

せんく [先駆]선구

のみならず [연어] 만이 아니라; 뿐만 아니라.

だっしゅ [奪取] 탈취.

まえぶれ[前触] 예고.전조(前兆)

きい[奇異]

ページ[]

めくる []넘기다

きげんぜん [紀元前] 기원 전

くるう [] 미치다

いきをのむ[] 놀라서 숨을 멈추다

いわ [違和] 위화; 몸의 조화가 흐트러짐

こらす[らす] (마음··귀 따위를) 한곳에 집중시키다.

けいしょう [継承]계승

わくぐみ[枠組] 틀을 짬; , 그 짠 틀

けいじじょうがく [形而上学]

えいきゅう [永久]

たかい [他界][완곡어]타계; 죽음.(=死去), [불교]인간계() 이외의 세계.

たんちょ[端緒]

しんと[信徒]

かいいん [会員]

たさい [多彩]다채.

 

38

げんしょうがく [現象学]

ふよ [賦与]부여; (분배해)

たいくつ[退屈] 지루함; 심심하고 따분함; 무료함

いわずもがなのことだ 말할 것도 없다

きゅうやく [旧約] 구약

p388-390 해석 띠우

 

근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라고 우선은 신중하게 유보하고, 요컨대 근대에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의 예언자적인 형식은 혁명적 담론, 현자적 형식은 철학적 담론, 교사적 형식은 교육제도에 각각 배분되었고, 파레시아적 형식은 그 자체로서는 소멸했고, 이는 혁명적 ·철학적 담론 및 교육제도와 접합한 형태가 아니라면 찾을 수 없다고. 또 그는 주체의 해석학의 시점에서, 진리의 도달 조건으로써 지식밖에 요구하지 않는(지식만 요구하는) ‘철학의 입장과, 도덕적인 수양과 신체적인 단련도 요구하는 영성의 입장과의 분리를 데카르트야말로발견했었지만, 이 두 개의 강의에서는 데카르트트에게서 정화로서의 철학, 즉 영성으로서의 철학의 선구를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목권력의 손 안에 있던 파레사아적 기능의 철학에 대한 탈취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역시 전조에 불과하다. 다소 기이한 인상을 남겨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추게 하지만 그것뿐인 것이다. 푸코는 그것을 넘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때는 기원전 5세기 말, 그것은 소크라테스로에서 시작한다. 플라톤의 말을 거꾸로 하면 미치지 않은 디오게네스인 소크라테스로에서여기에서 이미, 푸코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그의 독자라면 무언가 숨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푸코가, 기원전 5세기라고. 소크라테스라고. 그러나 위화감은 그대로, 지금은 눈을 집중하자. 기원전 5세기말,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당연히 플라톤으로 계승된 플라톤주의 그리고 신플라톤주의가 된 그리스도교에 계승되어 길게 서양적 사고의 결정적인 틀이 된 혼의 형이상학이다. 감각적인 세계, 육체의 세계를 초탈했던 절대적인 형상, ‘이데아, 정화된 , 영구불멸한 세계, 초월적인 타계를 전제로 한 형이상학. 그러나 또 거기에서는, 이미 본 생존의 미학의 단초도, 미적 대상으로서의 삶도 발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나타난 것, 그것은 이중이 되고 있다. 하나는 혼의 형이상학의 역사이고 또 하나는 생존의 문체론의 역사

푸코는, 혼의 형이상학생존의 문체론사이에 필연적인 관계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고, 유일의 관계도 아니다’. 생존의 문체론은 혼의 형이상학적 귀결도, 투영도, 적용도, 실천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플라톤주의적 · 신플라톤주의적인 혼의 형이상학틀 안에서도, 다양한 삶의 문체가 가능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듣고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도 일반 신도의 삶은 성직자의 삶과는 다르고, 수도사나 수도회원의 삶은 성직자의 삶과는 다르고 수도사나 수도회원의 삶은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성직자의 삶과는 같지 않았다이고, ‘4세기나 5세기의 금욕의 스타일과 17세기의 금욕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비교적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생존의 문체론은 다채로운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 뿐만 아니라 라캉에서도, 보는 것은 말하는 것을 이끌었다. 보는 것은 말하는 것, 그리고 의미하는 것과 이중이 되고 있고, 밝음은 언어의 밝음이기도 하고, 말하는 것이 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38 현상학에서 의 문제에서는, 지금 필자는 자세히 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밝음이 시각성에서도, 언어에서도 동시에 있는 어떤 종류의 투명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메를로 퐁티에서도 이것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라캉의 이미지언어의 이중성의 문제에서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조적 동형성을 논했던 이하를 참조. 본서 제16-17.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별은 이미 거기에서 보이는 것이 말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이 보이는 것과 같은 어떤 종류의 장치를, 즉 어떤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정된 주체화를 전제로 하고, 따라서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별은 들뢰즈가 푸코에게 발견했던 가시성과 언표 가능성의 분리 수준과는 동일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라캉은 자신의 상징계에, 그리고 상징계의 결국은 보완적인 외부의 안’, ‘내부의 밖에 불과한 저 지루한 대상a, 그리고 그 향락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본서 22부터 27절을 참조. 또 말할 필요가 없고, 본격적으로 논할 역량은 필자에게는 없지만, 서양적 사고에서 의 이중성은 구약성서 앞부분의 신의 최초의 발화, 세계를 정초하는 발화가 빛이 있으라였다는 것과 아마 무관계라고는 말할 수 없다. ‘빛이 있으라라고 신이 말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이로부터 일신교의 빛과 언어의 어떤 특정의 연관을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보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블량쇼와 가시성과 언표 가능성을 분리한 푸코, 그리고 푸코의 질문을 명확화했던 들뢰즈에서, 어떤 규모의 것이 내기에 걸려있는지도 보기 쉽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건달바

2017.11.05
12:21:22
(*.206.240.214)

p 384-386  건달바 (보론)


そっちょく[率直] 솔직, 솔직함

きりはなす[(り)す·(り)す]1(따로) 떼다. 2잘라 버리다; 분리하다. 3별개의 것으로 하다; 분리하다.

うよきょくせつ[紆余曲折]1우여곡절. 2꾸불꾸불함. 3복잡한 사정으로 여러 가지로 변화함.

じょげん [助言]

いかり [り]분노; 노여움

とする[する]걸다.

とうや[陶冶] 도야; 육성.

ゆきつく[く]1(목적지에) 이르다; 다다르다. 2정력·자력(資力) 따위가 다하다; 마지막 상태에 이르다.

しょうしょう[少少] 소소; 조금; 약간; 사소.

ぞくっぽい[っぽい]속되다; 통속적이다; 상스럽다.

ありふれる[れる]어디에나 있다; 흔하다; 지천으로 있다; 신기하지 않다.

ことがら[がら·事柄]사항; 일; 사물의 형편; 사정.

いじわる[意地]심술궂음; 짓궂음; 또, 심술쟁이.

はしたない[ない]1상스럽다; 천격스럽다; 야비하다. 2조심성이 없다; 버릇없다. 3경박하다; 소견이 얕다.

おのずと[(ず)と]→おのずから[ら]1저절로; 자연히

ながなが[]1길게; 기다랗게; 장황하게. 2오래도록; 오랫동안.

ふく[く] 닦다; 훔치다.

はらす[らす]1(비 따위를) 긋다. 2풀다. 3소원을 이루다; 성취하다.

キュニコス 키니코스 학파. 견유학파

へめぐる[経巡る·経回る]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 편력(遍歷)하다.

あまた[数多·許多]아어(雅語)]무수히; 허다하게

あらわ[·]1숨겨지지 않고 드러남; 노출함. 2공공연; 노골.


푸코는 그것과는 다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그리스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다른 것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주인=스승(maître)’과의 복종의 관계에 있는 주체의 설정이라는 구조자체를 법=주권적 권력의 이해와 중첩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것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고, 이미 기술한 대로 『주체의 해석학』에 전후하여 그의 ‘생존의 미학’의 논리 속에 ‘스승’의 모습이 등장할때부터 말한 것, 배려와 통치의 방향이 자기에 의한 자기의 통치, 바꿔말해 ‘자기에 의한 자기에의 배려’에서 사제관계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매개로 한 ‘자기에 의한 타자들의 자기의 통치’ ‘타자에 의한 자기에의 배려’로 논지의 중점은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고, 거기에는 일관했던 것이 있었다는 것도 알겠다. 그리고 애초에 ‘오로지 자기에 의한 자기에의 배려’는 푸코 자신이 당초부터 자기에의 배려를 ‘사회관계’에 열려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도(알겠다). 그리고 당초 민주제와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파르헤지아라는 개념은,  우여곡절을 지난 후 최종적으로 플라톤에 있어서 ‘군주의 혼’에 조언하는 ‘철학자’라는 형상 하에 결실을 맺게 된다. 파르헤지아는 군주제의 아래에서야 말로 효율이 좋은데 왜냐하면 민주제에서는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만 하지만, 군주제라면 한명으로 해결되니까 라고. 군주의 노여움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을 걸고 진실을 조언하는 철학자라는 모습, 그것은 당연 ‘철학자인 군주’ ‘철학자에게 도야된 혼을 가진 군주’를 너무 곤란한 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서양에서는 전통적이라 말해도 좋은 저 철학적인 입장에 다다른 것이다. 물론 그 ‘철인왕’의 모습을 단순하게 부정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 ‘도야’는 저 동서고금에 걸친 역사적 사상으로서도, 그러나 현재에 있어서도 다소 속된 방면에서도 사용되는 저 ‘제왕학’이라든가와 어떻게 다른 걸까, 지식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통치하는 군주라는 이미지는 캐리커쳐로서도 공적기관의 주도에 의한 식자 회의의 ‘사회를 향한 제언’ 등이라는 형태로 오늘날  바야흐로 망연자실할 정도로 흔한 순응주의적인 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약간 짓궂고 경박한 의문은 이 기회이니까 맞아 둔다 해도, 그래도 우리의 이 의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연구(!)로서의 가치는 어떻든 요컨대 최종적으로는 푸코 자신에 의해 부정되고 거절된 그리고 푸코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장기적으로 맞춰져 있다라는 의심, 그리고 불안은 닦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심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해소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여기에서 그 의심의 쪽이야말로 어리석은 미혹(방황)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 ‘키니코스 학파(견유학파)’의 이해에 의하면.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이상한 것이었을까를, 그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가 밟아온 오랜 도정 그 자체에 있어서 특이한 의미를 갖는가를, 우리는 보고 가지않으면 안 된다. 개라는 디오게네스의 모습, 거기에는 푸코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익숙해서 친숙해진 푸코인 것을 멈추는 모습이, 그리고 그가 편력해온 다양한 논리 속에 출현한 무수한 모습이 중첩되어 노출된 가시성의 섬광 아래에서 부상하기 때문에. 무슨 말일까.


인디언

2017.11.05
17:38:38
(*.186.81.96)

392-394(인디언)

ちゅうちょ [躊躇]

くらべる[比べる·較べる] 비교하다, 대조하다

しょうおう[照応]

ちょうわ [調和]

しゅくげん[縮減] 축감, 감축

しょよ [所与]

せきむ[責務]

むきだす[むき出す·剝き出す] 드러내다, 노출시키다

せつごう [接合]

みなれる [見慣れる·見馴れる] 늘보아서 익숙하다, 낯익다

きょうたん [驚嘆·驚歎]

なつかしい[懐かしい] 그립다, 반갑다, 귀엽다

くるまる [包まる] 휩싸이다

かんつう[貫通]

おうだん [横断]

てきよう [適用]

そこう [遡行·溯行] 소행, 거슬러올라감

しだん [指弾]

ちがいない[ちがいない·違いない]1.(‘…に~’의 꼴로) 틀림없다; 확실하다.

2.정말이다; 그렇다.

ほかならない[他ならない]1.(흔히,‘…に~’의 꼴로)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다; 틀림없다.

2.남과 달리 특별한 관계에 있다.

しょじょさく[処女作]

みいだす [見いだす·見出す] 찾아내다, 발견하다

あかるみ[明るみ] 밝은 곳, 드러난 곳, 공개된 곳

まなざし[眼差し·目差し·目指し·眼指し] 눈빛, 시선, 눈의 표정

さらす[晒す·曝す]1.햇볕에 쬐다; 또, 비바람을 맞히다.

2.바래다.

3.여러 사람의 눈에 띄게 하다

ふじょう [浮上]

ざいにん [罪人]

かくいつてき [画一的·劃一的]

しっかん [疾患]

そうわ [挿話]

----------------

직접적, 그리고 무매개적이라는 일순간 읽는 사람을 주저하게 만드는 어휘를 사용한 후에, 푸코는 즉시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플라톤의 ‘라케스’의 예와 비교해도 ‘진실을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의 관계가, 큐니코스파에 있어서는, 다른 양식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고 더욱 간결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관계에는 ‘호모포니’ ‘하모니’ ‘조응’은 없다라고. 조화없는 그 관계가 더욱 복잡하게도 되고, 더욱 간결하게도 되었다. 즉, 그것은 문자면으로는 ‘직접적’이지도 ‘무매개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실제, 푸코는 그 파르헤지아와 연관된 큐니코스파의 생존양식을 ‘동물적’이라고 형용하지만, 이 동물성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삶의 축소된 형식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명령된 형식으로서의 동물성’인 것이고, ‘동물성 그것은 소여가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동물성이란, 자기에 관한 존재방식, 끊임없는 시련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의 방식인 것입니다. 동물성, 그것은 단련입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책무이고, 동시에 타자에 대한 스캔들입니다.’ 의무이고, 단련이고, 책무이고, 스캔들이고, 삶의 명령받은 형식으로서의 동물성. 즉, 그것은 벌거벗은 삶이라는 삶정치학적 실체인 역사의 종말에 있는 동물이다 운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에서 직접적, 무매개적, 동물적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그 자체로는 필연적인 관계가 자명한 것으로서 있는 것은 아닌 어떤 가시성과 언표가능성의 ‘접합’의 노력, 창조적이라고 말해도 좋은 노력의 결과라는 것은 명백하다.

본성적으로는 분리했을 것인 ‘진리의 언표’ 수준과, ‘가시적인 삶의 양식‘의 수준이,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역사상의 결합으로서의 큐니코스파. 여기까지는 괜찮다. 여기에 놀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표가능성과 가시성의 결합의 역사성---누구에게나 익숙한, 저 경탄할만한 모습, 저 그리운 푸코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갑자기 그의 논리는 기묘한 고양에 휩싸이게 된다.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큐니코스파는 단순히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철학 중의 좀 특수한, 특이한, 그리고 결국은 잊혀져가버릴 형상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아래, 다양한 목표를 가진, 서양사전체를 관통하는(횡단하는), 역사적 카테고리이지만,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zslzhtm파는 사상사와 한몸이고, 또 서양의 생존과 주체의 역사와도 한몸입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푸코는 말한다. ‘이 초역사적인 큐니코스파’라고. 초역사적이라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저, 초역사적인 개념의 적용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그가. 어떤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초역사적으로 소급해서 적용하여 ‘보편적인 진로’로 하는 것---이것을 계속 지탄해온 것 이것을 자기의 의무로 해왔던 것이 확실하고 또 확실한 그가. 그렇다. 실제적인 처녀작인 『광기의 역사』부터 『앎의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시에 단절을, 절단만을 찾아내왔던 것이다. 돌연 광기가 치료가능한 것으로 되어 의학의 대상이 되었던 순간에, 신체가 죽음의 밝음 속에 시선에 노출된 순간에, 모든 종류의 죄인이 획일적으로 감시되고 감금되는 순간에. 그리고 그는 계속 반복해왔다. 광기가 정신질환인 것도, 성이 억압받고 있고 해방되어야만 하는 무엇인 것도, 근친상간의 금지조차도, 불변하는 인간의 조건은 아니고, 초역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초역사적’이라는 어휘를 말하고 있다. 단절과 절단을 말하던 사람이. 게다가 그는 철학사상의 작은 삽화에 지나지 않는 큐니코스파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지만 그는 계속한다.

띠우

2017.11.05
20:06:23
(*.126.164.135)

제가 지난 주에 빠져서 어디서부터 시작인지는 모르지만 올라온 대로 편집했어요.

뚜버기님 부분이 빠져있는 것 같네요~ 

첨부 :
p 384~394 단어편집본.hwp [File Size:32.0KB/Download5]

뚜버기

2017.11.06
02:38:35
(*.34.153.115)

뚜버기것 추가 편집

첨부 :
p 384-394 단어편집본.hwp [File Size:48.0KB/Download3]

뚜버기

2017.11.06
02:36:46
(*.34.15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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