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강독

p 375-377 수정해석 건달바 




  보론   이 집요한 개들                                                                                                 (2009년 6월)




  이미 죽음까지 한달도 남지 않았던 1984년 5월 29일. 자택요양 중이었던 미셀 푸코는 갑자기 이렇게 말을 꺼낸다.

  

  ——생존의 스타일, 그것은 멋진 것이죠. 당신은 당시의 그리스인들을 멋지다고 생각하셨죠?

  푸코:  아니오.

  ——훌륭하지도, 멋지지도 않다고요?

  푸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푸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요. 내가 고대 도덕의 모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그들은 바로 걸려 넘어졌던 것이죠. 즉 한편에서는 생존의 어떤 종류의 스타일의 집요한 추구가 있었지만, 또 한편에는 그것을 만인에게 공통의 것으로 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은요, 그들이 아마 다소는 막연하게 세네카와 에픽테토스와 함께 근접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인 스타일 내부에서만 그것에 전념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고대 전체가 <깊은 오류>였던 것 같습니다.


  프레데릭 그로도 말한대로 여기에는 ‘수수께끼같은 실망’이라고 불러야할 뭔가가 있다. 말년의 푸코가 스스로 이끈, 그리고 자신의 논리를 이끌게 한 저 ‘생존의 미학’에 대한, 어딘가 잠시의 무력함과 주저 같은 인상도 약간 남기긴 하지만 여전히 단호한 거절이 [있다]. 도덕성, 윤리, 자기에의 배려, 생존의 미학. 이러한 모든 일을 그는 오랜 동안에 걸쳐 거의 열에 들뜬 듯이 이야기 해왔던 것이다. ‘자기에의 배려(epimeleia heautou, cura sui)’, 그리고 ‘생존의 기법(l’art de l’existence)’. 이른바 ‘자기자신에게 배려하고, 자기에게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를 아름답게, 윤리적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예술로 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다양하게 바꿔 말해진다. 자기자신이 성장하다, 자기자신을 개선하다, 자신에게 돌아가다, 자기을 형성하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다, 자기에게 전념하다, 자기에게 몸을 바치다, 자기 안에 틀어박히다, 자기자신에 머물다.’ 자기를 하나의 미()로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윤리’의 아래에서 단련하는 것, 이것은 단지 정보나 앎의 집적에 머무는 것이 아닌 뭔가 다른 주체화에 대한 가능성을 펼칠 것이었다. 세네카를 단숨에 요약하고 푸코는 말했다. ‘삶을 일종의 영원한 단련으로 바꾸어라’. 영원한 단련 아래에서 삶은 하나의 예술로 정련되어 갈 것이었다. ‘미적 예술작품의 재료로서의 삶이라는 관념에 나는 매료되었다. 마찬가지로 도덕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는 법률처럼 어떠한 권위체계와도 아무 관계도 없는, 또한 규율의 짜임새와도 관계 없는, 생존의 강력한 구조일 수 있다라는 생각도’ 라고 말하며, 그는 거기에 끌리는 것을 숨기지는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은 사람이 고대 그리스인에게 현대의 우리 자신이 짐어져야 할 문제의 회답을 직접 구한다고 하는 우를 범할 리는 없다.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그는 극명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페이지에, 종교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은 그리스인과 닮아 있지 않는가 라고도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항운동은 과학 외에 도덕을 찾을 수 없다’라고. 생존의 스타일, 생존의 미학, 그것은 일반적인 법에 회수되는 것이 아닌 특이한 도덕과 윤리의 장일 터였다. 그가 가혹하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심하게 비판해 왔던 법=주권권력과, 그리고 또한 그 법 아래에 있는 의례로서의 사목권력과는 다른 것의 제시가, 거기에는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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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댓글

인디언

2017.11.05
18:36:42
(*.186.81.96)

보론수정(382-383) 인디언


자신을 아름다움으로서 세운다는 나르시스적인 행동에 싫증난다면, 이번에는 항아리에 들어간 디오게네스인체 하면서 개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인가, 아직까지 '시대착오적인 프랑스 현대사상' 에 몰두하고 있는 일당도 수고많으시네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야유를 감수해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에 휩싸여 움직일 수도 없게 되는 저 어두운 의혹과 고민의 한 점으로, 우리는 또 푸코와 함께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닌가. 푸코와 함께라면, 그렇더라도, 라고 중얼거린다면 아직 괜찮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여기에서 그것은 푸코에게 단지 '연구대상', 실증적인 역사연구의 냉정한 '연구제목'에 지나지 않았고, 그같은 고양이나 열기는 우리들은 애초에 푸코와 그의 논지에 대해 또는 그 '연구대상'에 대해 갖지 않았다고 강변하며 시치미를 뗀다면,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에 걸쳐서 계속 푸코를 읽어왔을까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따분한 일이다. 실제, 이 두 권의 강의록 대부분은, 기묘한 따분함과 평범함의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말해도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다고 비난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정밀하다고 해도 좋은 텍스트의 독해가 떠받치는, 명석하고 실수없는 강인한 도식화의 힘을 추진력으로 삼고 있는 이들 강의 기록에 대해, 읽을 만한 곳이 없다든가, 쓸모없는 문자희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에서 투키디데스를 거쳐 플라톤에 이르기 까지, 여러 텍스트에 의거하면서 거기에 하나하나 파르헤지아의 개념화의 변천을 밝혀내온 길 안에서, 당연히 거기에는 민주제 파르헤지아로부터 군주제 파르헤지아로의 이행, 그리고 그 이행 안에서 일어난 파르헤지아의 위기 등, 매우 흥미로운 논점이 여러 가지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도정 안에서, 또 그 한 가운데서, 연속해서 계속, 플라톤의 서간 중에 출현하는 파르헤지아의 개념 분석에서 푸코 자신이 갑자기 플라톤이 말해온 것 그 자체는 '평범'하고 따분하다고 강의 중에 말해버릴 때, 우리에게는 무언가 묘한 뒷맛이 남게 된다. 근소하지만 없느니만 못한 인기영합적인 느낌을 때로 받게 되고,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인상도 없지 않은 기나긴 분석을, 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해왔는지 별안간 알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확인해두자. 개인에 대한 인도를 내가 할 일로 생각하는 사목권력의 내부에 있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타자에게 말하는 것' 즉, 고해제도의 틀 속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에 의한 구원을, '비루하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구원과 기쁨을 얻는 저 그리스도교의 절차분석에서부터 온 것이므로, 이 파르헤지아는 그것과는 또 다른, '타자에 관하여, 타자에게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말하기'라는 다른 정치적 영역과 자기 도야와의 연관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려한 시도였다는 것은 알겠다. 파르헤지아는 원뜻으로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솔직히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유럽에서는, 그것은 바로 청죄사제나 정신분석가 앞에서 하는 행동이고, 자신의 죄,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전부'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거꾸로 자기 안에 벌받을 수 밖에 없는 죄와 욕망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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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17.11.11
19:29:21
(*.126.164.135)

p388-390 수정해석 띠우

 

근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라고 우선은 신중하게 유보해 두고, 요컨대 근대에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의 예언자적인 형식은 혁명적 언설, 현자적 형식은 철학적 언설, 교사적 형식은 교육제도에 각각 배분되었고, 파르헤지아적 형식은 그 자체로서는 소멸했고, 이는 혁명적 ·철학적 담론 및 교육제도와 접합한 형태가 아니라면 찾을 수 없다고. 또 그는 주체의 해석학의 시점에서, 진리의 도달 조건으로써 지식만 요구하는 철학의 입장과, 도덕적인 수양과 신체적인 단련도 요구하는 영성의 입장과의 분리를 데카르트야말로 발견했었지만, 이 두 개의 강의에서는 데카르트트에게서 정화로서의 철학, 즉 영성으로서의 철학의 선구를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목권력의 손 안에 있던 파레사아적 기능의 철학에 대한 탈취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역시 전조에 불과하다. 다소 기이한 인상을 남겨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추게는 하지만 그것뿐인 것이다. 푸코는 그것을 넘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때는 기원전 5세기 말, 그것은 소크라테스로에서 시작한다. 플라톤의 말을 거꾸로 하면 미치지 않은 디오게네스인 소크라테스로에서여기에서 이미, 푸코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그의 독자라면 무언가 숨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푸코가, 기원전 5세기라고. 소크라테스라고. 그러나 위화감은 그대로, 지금은 눈을 집중하자. 기원전 5세기말,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당연히 플라톤으로 계승된 플라톤주의 그리고 신플라톤주의가 된 그리스도교에 계승되어 길게 서양적 사고의 결정적인 틀이 된 영영혼의 형이상학이다. 감각적인 세계, 육체의 세계를 초탈했던 절대적인 형상, ‘이데아, 정화된 영영혼, 영구불멸한 세계, 초월적인 다른 세계를 전제로 한 형이상학. 그러나 또 거기에서는, 이미 본 생존의 미학의 단초도, 미적 대상으로서의 삶도 발견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나타난 것, 그것은 이중이 되고 있다. 하나는 영혼의 형이상학의 역사이고 또 하나는 생존의 문체론의 역사

푸코는, 영혼의 형이상학생존의 문체론사이에 필연적인 관계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고, 유일의 관계도 아니다’. 생존의 문체론은 영혼의 형이상학적 귀결도, 투영도, 적용도, 실천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플라톤주의적 · 신플라톤주의적인 영혼의 형이상학틀 안에서도, 다양한 삶의 문체가 가능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듣고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도 일반 신도의 삶은 성직자의 삶과는 다르고, 수도사나 수도회원의 삶은 성직자의 삶과는 다르고 수도사나 수도회원의 삶은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성직자의 삶과는 같지 않았다이고, ‘4세기나 5세기의 금욕의 스타일과 17세기의 금욕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비교적 변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러나 생존의 문체론은 다채로운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 뿐만 아니라 라캉에서도, 보는 것은 말하는 것을 이끌었다. 보는 것은 말하는 것, 그리고 의미하는 것과 이중이 되고 있고, 밝음은 언어의 밝음이기도 하고, 말하는 것이 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38 현상학에서 의 문제에서는, 지금 필자는 자세히 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밝음이 시각성에서도, 언어에서도 동시에 어떤 종류의 투명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메를로 퐁티에서도 이것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라캉의 이미지언어의 이중성의 문제에서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조적 동형성을 논했던 이하를 참조. 본서 제16-17.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별은 이미 거기에서 보이는 것이 말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이 보이는 것과 같은 어떤 종류의 장치를, 즉 어떤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정된 주체화를 전제로 하고, 따라서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별은 들뢰즈가 푸코에게 발견했던 가시성과 언표 가능성의 분리 수준과는 동일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라캉은 자신의 상징계에, 그리고 상징계의 결국은 보완적인 바깥으로서의 안’, ‘안으로서의 밖에 불과한 저 따분한 대상a, 그리고 그 향락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본서 22부터 27절을 참조. 또 말할 필요가 없고, 본격적으로 논할 역량은 필자에게는 없지만, 서양적 사고에서 의 이중성은 구약성서 앞부분의 신의 최초의 발화, 세계를 정초하는 발화가 빛이 있으라였다는 것과 아마 무관계라고는 말할 수 없다. ‘빛이 있으라라고 신이 말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이로부터 일신교의 빛과 언어의 어떤 특정의 연관성을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보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블랑쇼나 가시성과 언표 가능성을 분리한 푸코, 그리고 푸코의 질문을 명확히 한 들뢰즈가 어느 정도 되는 규모의 것을 판돈으로 걸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쉬워지지 않을까.

인디언

2017.11.13
07:07:22
(*.186.81.96)

보론(392-394) 수정해석(인디언)


직접적, 그리고 무매개적이라는, 일순간 읽는 사람을 주저하게 만드는 어휘를 사용한 후에, 푸코는 즉시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플라톤의 ‘라케스’의 예와 비교해도 ‘진실을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의 관계가, 견유학파에 있어서는, 다른 양식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고 더욱 간결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관계에는 ‘호모포니’ ‘하모니’ ‘조응’은 없다 라고. 조화없는 그 관계가 더욱 복잡하게도 되고, 더욱 간결하게도 되었다. 즉, 그것은 문자면으로는 ‘직접적’이지도 ‘무매개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실제, 푸코는 그 파르헤지아와 연관된 견유학파의 생존양식을 ‘동물적’이라고 형용하지만, 이 동물성에 관해 그는 차례차례 말했다. 그것은 ‘삶의 축소된 형식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명령된 형식으로서의 동물성’인 것이고, ‘동물성 그것은 소여가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동물성이란, 자기에 관한 존재방식, 끊임없는 시련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의 방식인 것입니다. 동물성, 그것은 단련입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책무이고, 동시에 타자에 대한 스캔들입니다.’ 의무이고, 단련이고, 책무이고, 스캔들이고, 삶의 명령받은 형식으로서의 동물성. 즉, 그것은 벌거벗은 삶이라는, 생명정치학적 실체인 역사의 종말에 있는 동물이다 운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에서 직접적, 무매개적, 동물적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그 자체로는 필연적인 관계가 자명한 것은 아닌, 어떤 가시성과 언표가능성의 ‘접합’의 노력, 창조적이라고 말해도 좋은 노력의 결과라는 것은 명백하다.


본성적으로는 분리되었을 ‘진리의 언표’ 수준과, ‘가시적인 삶의 양식‘의 수준이,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역사상의 결합으로서의 견유학파. 여기까지는 괜찮다. 여기에 놀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표가능성과 가시성의 결합의 역사성---누구에게나 익숙한, 저 경탄할만한 모습, 저 그리운 푸코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갑자기 그의 논리는 기묘한 고양에 휩싸이게 된다.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견유학파는 단순히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철학 중의 좀 특수한, 특이한, 그리고 결국은 잊혀져가버릴 형상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아래, 다양한 목표를 가진, 서양사전체를 관통하는(횡단하는), 역사적 카테고리이지만,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견유학파는 사상사와 한몸이고, 또 서양의 생존과 주체의 역사와도 한몸입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푸코는 말한다. ‘이 초역사적인 견유학파’라고. 초역사적이라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저, 초역사적인 개념의 적용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그가. 어떤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초역사적으로 소급해서 적용하여 ‘보편적인 진리’로 하는 것---이것을 계속 지탄해온 것, 이것을 자기의 의무로 해왔던 것이 확실하고 또 확실한 그가. 그렇다. 실제적인 처녀작인 『광기의 역사』로부터 『앎의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사에서 단절을, 절단만을 찾아내왔던 것이다. 돌연 광기가 치료가능한 것으로 되어 의학의 대상이 되었던 순간에, 신체가 죽음의 공개된 시선에 노출된 순간에, 모든 종류의 죄인이 획일적으로 감시되고 감금되는 순간에. 그리고 그는 계속 반복해왔다. 광기가 정신질환인 것도, 성이 억압받고 있고 해방되어야만 하는 무엇인 것도, 근친상간의 금지조차도, 불변하는 인간의 조건은 아니고, 초역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초역사적’이라는 어휘를 말하고 있다. 단절과 절단을 말하던 사람이. 게다가 그는 철학사상의 작은 삽화에 지나지 않는 견유학파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지만 그는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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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17.11.13
14:31:56
(*.168.48.172)

380-381

그렇다. 우리가 생존의 미학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에의 배려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과다하게 갖는 것은 아닐까? 자기에의 탐닉, 복종하기 위한, 금전을 위한, 이 사회의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기성의 구조 속에서 출세하기 위한,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차려 적응하기 위한, 반 발 앞서 재빨리 기회를 잡기 위한, 사전에 저항을 눌러 궤멸시키기 위한. 반복한다. 그들이 나름대로 진지하게 노력한다는 것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때로는 추하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거부하려면 상당히 어려운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푸코가 최후에 내비친 실망도 이렇게 보면 당연한 것은 아닐까. 이 논점에 관한 한, 무엇인가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 생존의 미학, 이 자기에의 배려를, 혁명과 저항의 미약하지만 그러나 확고한 거점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생존의 미학은 그것 자체로는 어떠한 혁명이나 변혁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 대부분은 저항은커녕 다만 타락에 가까운 현상긍정에 결부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결론으로 생존의 미학을 놓은 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해야만 한다어떻게 하더라도 그렇게 되어버리지 않는가, 나는 의심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푸코 자신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되었다. 문제는 다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욱 어떤 의심에 노출되어야만 한다. 2008년 및 2009년에 출판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푸코 최후의 2년간의 강의록 자기와 타자들의 통치및 그 제2권인 진리에의 용기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두 권의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그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억누를 수 없는 떨림의 행위가 되지는 않는다. 저 미셸 푸코의 최후의 강의를 읽는 것, 저 최후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동반하여 마땅히 그래야 할 고양과 열기그러나 그것은 돌연 차갑게 식고 시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말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을 둔 생존의 스타일에의 거부는, 이 강의를 끝낸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강의의 마지막 날짜는 1984328일이고, 앞에 인용한 인터뷰의 날짜는 반복하지만 1984529. 그리고 그는 1984625일 오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다. 이 거절은 이 두 권의 강의록의 내용에까지 소급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자기에의 배려, 생존의 미학에의 기대가 그 대부분은 어리석은 몽상이었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 두 권에서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고 때때로 들어온 역시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파르헤지아키니코스학파(견유학파)’에 대한 기묘한 기대를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 대해서도, 푸코는 미리 찬물을 끼얹은 것은 아닐까. 생존의 미학이 단순한 상류계급의 인맥유지를 위한 유행이나 컬트 집단에서의 수행에 속하는 전전긍긍하는 개미의 근면함 같은 것에 다름 아닌 것처럼, 가령 죽음을 걸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된 저 파르헤지아도 우파 깡패의 정신승리법이나 우국의 간언과 같은 것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요요

2017.11.13
14:55:43
(*.168.48.172)

390-391수정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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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17.11.13
15:15:20
(*.168.48.172)

400-401 수정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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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바

2017.11.14
00:26:59
(*.206.240.214)

p 384-386  수정해석 건달바


푸코는 그것과는 별개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그리스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별개의 것은 있을 것이다. 물론 ‘주인=스승(maître)’과의 복종의 관계에 있는 주체의 설정이라는 구조자체를 법=주권적 권력의 이해와 중첩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것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고, 이미 기술한 대로 『주체의 해석학』에 전후하여 그의 ‘생존의 미학’의 논리 속에 ‘스승’의 모습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배려와 통치의 방향이 자기에 의한 자기의 통치, 즉 ‘자기에 의한 자기에의 배려’에서 사제관계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매개로 한 ‘자기에 의한 타자들의 자기의 통치’ ‘타자에 의한 자기에의 배려’로 논지의 중점은 이행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일관된 것이 있다는 것도 알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푸코 자신이 당초부터 자기에의 배려를 ‘사회관계’에 열려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상, ‘오로지 자기만에 의한 자기에의 배려’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도. 그리고 당초 민주제와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파르헤지아라는 개념은, 우여곡절을 지난 후 최종적으로 플라톤에 있어서 ‘군주의 영혼’에 조언하는 ‘철학자’라는 형상 하에 결실을 맺게 된다. 파르헤지아는 군주제의 아래에서야 말로 효율이 좋은데, 왜냐하면 민주제에서는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만 하지만 군주제라면 한명으로 해결되니까 라고. 군주의 노여움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을 걸고 진실을 조언하는 철학자라는 모습, 그것은 ‘철학자인 군주’ ‘철학자에게 도야된 영혼을 가진 군주’를 지나치게 곤란한 이상으로서 가지고 있는 서양에서는 당연히 전통적이라고 말해도 좋은 저 철학적인 입장에 다다른 것이다. 물론 그 ‘철인왕’의 모습을 단순하게 부정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 ‘도야’는 저 동서고금에 걸친 역사적 사실과 현상으로서도, 그러나 현재에 있어서도 다소 속된 방면에서도 사용되는 저 ‘제왕학’이라든가와 어떻게 다른 걸까, 지식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통치하는 군주라는 이미지는 캐리커쳐(풍자화)로 있더라도, 공적기관의 주도에 의한 식자회의의 ‘사회를 향한 제언’ 등의 형태로 오늘날 바야흐로 망연자실할 정도로 흔한 순응주의적인 사안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 약간 짓궂고 경박한 의문은 이 기회에 맞아 두지만, 그래도 우리의 이 의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연구(!)로서의 가치는 어떻든 요컨대 최종적으로는 푸코 자신에 의해 부정되고 거절된 그리고 푸코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장기적으로 맞춰져 있다라는 의심 그리고 불안은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심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해소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여기에서 그 의심의 쪽이야말로 어리석은 미혹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 ‘견유학파’의 이해에 의하면.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이상한 것이었던가를, 그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가 밟아온 오랜 도정 그 자체에 있어서 얼마나 특이한 의미를 갖는가를, 우리는 보고 가지않으면 안 된다. 개인 디오게네스의 모습, 거기에는 푸코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해서 친숙해진 푸코인 것을 멈추는 모습이, 그리고 그가 편력해온 다양한 논리 속에 출현한 무수한 모습이 중첩되어 노출된 가시성의 섬광 아래에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인가.


건달바

2017.11.14
00:58:38
(*.206.240.214)

p 394-396  수정해석 건달바


  ‘진리의 살아있는 스캔들로서의 생존의 형식, 이것이야말로 견유학파의 핵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사태를 명확하게 하면서, 그는 우선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견유학파를 찾아낸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행과 견유적인 단련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며, 먼저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 현상을 지적한 후,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가 ‘그 무일푼, 방랑, 가난, 구걸’에 있어 어떤 점에서는 ‘중세 그리스도교단의 견유학파’였다고 말하고,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증거로 그들은 ‘주님의 개(Domini canes)’라고 자칭했다고 말한다. 혹은 퐁트브로 수도원의 창립자인 프랑스 서부의 그리스도교 영성의 고취자 아흐브리쌜의 로베르토의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마을에서 마을로 걷고 성직자의 퇴폐와 싸움’이라는 묘사에서 그리스도의 헐벗음에 대한 준거와 함께 ‘견유학파의 헐벗음에 대한 준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완전한 그리스도교의 견유학파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제도적인 견유학파이고 반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견유학파가. 더욱더 활기에 찬 그 형식, 그 흔적은 종교개혁의 전야에 현저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중에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내부에서도,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의 내부에서도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교 견유학파의 오랜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이미 뭔가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계속한다. 다음으로 견유학파의 환생으로서 그가 든 것은 ‘혁명’이다. 그것도 근대의.

  ‘좀 더 우리에게 가까운 곳에 서서 보면 견유학파적인 본연의 자세의 다른 기반을 흥미깊게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진리의 스캔들 속에 있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견유학파를 말이죠. 그것은 종교적인 제도나 실천 속에는 더이상 없고, 정치적인 실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거기에서 다양한 혁명운동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견유학파라는 것은 진리의 난폭한, 폭력적인, 파렴치한 표명인 삶의 양태에 관한 사상이고, 그것은 혁명적 실천의 일부를 지금도 이루고 있고 이전에도 이루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 내내 혁명운동에 의해 채용되어 온 여러 형식의 일부도요. 근대 유럽 세계의 혁명이란--이것에 관해서는 아마 작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해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만--단순히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것은 또한 삶의 형식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견유학파의 혁명. ‘혁명적 활동으로서의 삶’을 편의적으로 ‘전투주의(militantisme)’로 부른다면 이라고 푸코는 말을 잇는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있어서 그것은 세개의 형식을 취했다. 첫번째는 공식적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사교집단으로서의 ‘비밀결사’, 두번째는 공식적으로 인지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 그리고 푸코는 세번째 것을 중시한다. 이렇다.


띠우

2017.11.14
21:13:27
(*.126.164.135)

p398 수정해석 띠우

 

근대예술의 개.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완전히 특이한 무엇인가가 유럽 문화 속에 나타났다’. 그것은 예술가의 삶이다. 물론 바사리의 저작이나 벤베누트 · 체리니의 자전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술가가 파격인 삶을 산다는 것은 당시에도 아주 흔한 생각이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이것과 다른 것이다. 예술가의 삶은, 그것이 다루는 형식 그 자체로도, 예술이 그 진리에 있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념이 출현한 것이다. , ‘예술은 생존에 하나의 형식을, 다른 형식과 완전히 단절하고 있는 하나의 형식을 줄 수 있는가이고, 그 삶의 형식이야마로 참된 삶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 예술가의 삶이 참된 삶이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예술가의 삶이 만들어낸 작품을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여기에서는 예술진리가 어떤 순환 아래에 결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말한다, 진리로서의, 그리고 예술작품 그 자체로서의 예술가의 삶스캔들러스한 단절의 표명으로서의 삶의 견유학파적 원리를 다시 되찾는 방법인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근대 세계에서의 예술이 견유학파의 담지자였다는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모든 예술형식에, 기성의 모든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일종의 견유주의가 있다’. 예술은 그 장르 여하와 상관없이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그 관계는 이미 장식의 차원, 모방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발가벗기는 것, 폭로하는 것, 벗기는 것, 구멍을 뚫는 것, 생존의 기본 요소에까지 폭력적으로 잘라내는 것, 그러한 것의 차원에 있다’. 이리하여 예술은, 문화에 대해서, 사회규범에 대해서, 미학적인 가치와 규범에 대해서, 잘라내고, 거부하고, 습격을 행하는, 그러한 논쟁을 요청하는 관계를 확립한다’. 이 문화 속에서 권리를 갖지 않은 사람의 침입의 장소로서의, ‘알몸으로 벗겨서’ ‘이미 획득된 모든 형식을 끝없이 거절하고 거부하는예술. 그것은 ‘19세기의 아마도 중반부터더욱 뚜렷하게 출현시키게 되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근대 예술의 안티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을 담당한 자로서 열거된 이름은, 최초에 그가 말한 보들레르와 플로베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넓다. 푸코는 말한다, ‘마네부터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보들레르부터 사뮈엘 베케트나 버로스까지’.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p.403~404 수정해석

그렇다. 여기에는 다른 것이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다른 삶으로의 변화를 희구하는, 이상하도록 집요한 지속이다. 투쟁의 계속이다. 보편적인 것, 불변인 것에 저항하려는 자들의 지속이다. 혁명, 예술, 영성을 관통하여 조용히 울림을 멈추지 않는 전쟁의 굉음.’ 이 집요한 개들. 멀리 또 가까이에 끊어진 적 없었던 그 사나운 모습, 울부짖는 소리. 어떤 것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주구일 수는 없는 개들의 신출귀몰. 그것은 초역사적인 것에 대한 반항의 초역사성이다. 불멸의, 영구적이지 않은 그것은 항상 전복할 수 있다는 것 자체의 영원이다. 그리고 아마 어떻게 해도 이렇게 된다.──지금도 그 개들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 그 곡성은 지금도 들린다. 베케트와 푸코와 버로스가 살고 있던 때까지 계속되었던 그 싸움이 우리 시대에 사라졌다는 증명을 누가 해줄 것인가.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가 아니라 주구라고, 그렇게 되지 않는가.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푸코는 이 파르헤지아와 생존의 미학의 특이한 접합의 다종다양한 양태를 얻으려는 그 개의 모습, 그 저항과 모독과 빈곤과 투쟁의 모습을 부정하고 죽은 것이었을까. 이것도 또한 기분이 나쁜’ ‘깊은 오류였던 것일까. 세네카와 에픽테토스는 개가 아니다. 그러나 푸코가 키니코스파의 모습을 그려낼 때 에픽테토스의 문헌을 참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대를 초탈하는 키니코스파의 지속을, ‘고대 전체오류로 하는 이 문언으로 부정할 수 있었다는 것일까.──등 여러 가지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우리의 문제이다. 그의 속마음을 헤아려도 어쩔 수 없고, 이 이상 헤아릴 수 없다. 그가 이 사나운 개의 모습을 부정하고 죽었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그것은 우리가 생각해야할 우리의 문제, 우리의 선택이다.

논리는 다했다. 붓을 내려놓아야만 할 것이다. 이 문제의 소재를 분명히 한다면 본고의 목적은 달성하게 된 것일 테니까. 거기에 필자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는, 독자에게는 이미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92 혹시나 생각이지만 확실히 해두자. 개의 투쟁의 초역사화, 내외를 묻지 않고 푸코에 대한 다소 엉성한 의거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생명정치의 실체실체화초역사화와는 전혀 다르다. 생명정치의 초역사화의 담론은 대체로 양식 없는’ ‘벌거벗은 삶이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극복 불가능한 역사적 지점, ‘역사의 종말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푸코는 앎의 의지안에서조차 분명하게 생명정치 및 전략 목표는 근대에 한정한 것뿐만 아니라, ‘삶 그것은 그것에서 항상 도망간다라고 말하고, 그가 생명정치의 대상을 실체화했다는 것은 한 번도 없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은 생명정치라고 하는 배치가 도출했던 환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정되었던 전략목표에 불과하고, 실체화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 푸코의 이 견유학파적 형상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을 인도하거나 그런 것으로 인도되지도 않는다. 인도하거나 인도된다고 한다면, 그 역의 것을, 그 역의 것으로, 이다.

 

띠우

2017.11.14
21:32:28
(*.126.164.135)

우선 후기가 안 올라온 부분은 단어 숙제에 올리신 내용을 가져와서 묶었습니다. 

원본과 대조 작업은 아직 못했구요. 우선 읽어보시게 묶어두기만 했습니다.

첨부 :
보론 전체 후기.hwp [File Size:48.0KB/Download9]

뚜버기

2017.11.18
22:56:19
(*.34.153.115)

뚜버기 부분 수정해석 끼워넣었습니다 (386,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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