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강독

p398 단어 띠우

 

じでん [自伝]자전

はかく [破格]파격; 격을 벗어남.

しょうする[する]증명하다

-だて[](動詞連用形를 받아서 名詞를 만듦) 특별히[일부러, 필요 이상으로] 함을 나타냄.

じゅんかん [循環]순환.

そうしょく [装飾] 장식.

あかはだか[赤裸] 알몸뚱이; 赤裸적나라하게

むく[] 벗기다

うがつ[穿]뚫다

しゅうげき [襲撃]습격.

いどむ[] 도전하다, 청하다

ろんせん [論戦] 논쟁

らぎょう[裸形] 나형; 나신; 알몸

よりいっそう[より一層]더한층; 한층 더; 보다 더.

 

 

근대예술의 개.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완전히 특이한 무엇인가가 유럽 문화 속에 나타났다’. 그것은 예술가의 삶이다. 물론 바사리의 저작이나 벤베누트 · 체리니의 자전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술가가 파격인 삶을 산다는 것은 당시에도 아주 흔한 생각이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이것과 다른 것이다. 예술가의 삶은, 그것이 다루는 형식 그 자체로도, 예술이 그 진리에 있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념이 출현한 것이다. , ‘예술은 생존에 하나의 형식을, 다른 형식과 완전히 단절하고 있는 하나의 형식을 줄 수 있는가이고, 그 삶의 형식이야마로 진정한 삶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 예술가의 삶이 진정한 삶이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예술가의 삶이 만들어낸 작품을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여기에서는 예술진리가 어떤 순환 아래에 결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말한다, 진리로서의, 그리고 예술작품 그 자체로서의 예술가의 삶스캔들러스한 단절의 표명으로서의 삶의 견유학파적 원리를 다시 되찾는 방법인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근대 세계에서의 예술이 견유학파의 담당이었다는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모든 예술형식에, 기성의 모든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일종의 견유주의가 있다’. 예술은 그 장르 여하와 상관없이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그 관계는 이미 장식의 차원, 모방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벗기는 것, 폭로하는 것, 벗기는 것, 구멍을 뚫는 것, 생존의 기본 요소에까지 폭력적으로 잘라내는 것, 그러한 것의 차원에 있다’. 이리하여 예술은, 문화에 대해서, 사회규범에 대해서, 미학적인 가치와 규범에 대해서, 잘라내고, 거부하고, 습격을 행하는, 그러한 논쟁을 요청하는 관계를 확립한다’. 이 문화 속에서 권리를 갖지 않은 사람의 침입의 장소로서의, ‘알몸으로 벗겨서’ ‘이미 획득된 모든 형식을 끝없이 거절하고 거부하는예술. 그것은 ‘19세기의 아마도 중반부터더욱 뚜렷하게 출현시키게 되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근대 예술의 안티플라톤주의이고, 그것을 담당한 자로서 열거된 이름은, 최초에 그가 말한 보들레르와 플로베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넓다. 푸코는 말한다, ‘마네부터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보들레르부터 사뮈엘 베케트나 버로스까지’.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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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17.11.12
01:29:54
(*.120.46.152)

403~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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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17.11.12
10:12:41
(*.178.61.222)

야전과영원400~401

 

おう[]

ゆうしゅつ [湧出·涌出]

はいご [背後]

ぼたい [母胎]

はいが [はい·胚芽]

うぬぼれる[己惚れる·自惚れる] (실력 이상으로) 자부하다; 자만하다.

なれなれしい[れしい] 친압(親狎)하다; 허물[버릇]없다.

いきのびる[()びる] 1.오래 살다; 장수하다. 2.살아 남다; 목숨을 부지하다.

 

 

근대예술, 그것은 문화에서의 견유학파이고, 자기 자신에게 항거하는 문화의 견유주의입니다. 그것은 다만 예술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 입을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갖고 진실을 말하는 것의 가장 격렬한 형식들이, 근대세계에서 곧 우리 자신의 세계에서 집중하는 것은 특히 예술인 것입니다. 이러한 한에서 견유학파적 양식의 역사, 견유학파적 실천의 역사, 진리의 표명과 결합한 삶의 양식인 견유학파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근대예술에서 기술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혁명운동에서도 할 수 있고, 기독교적 영성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야말로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반플라톤주의인 견유학파를 혁명운동과 근대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 후에야말로, 견유학파의 본질적인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참된 삶은 다른 삶이다, 라는 관념에서 견유학파의 역사의, 철학의 역사의, 동시에 서양윤리의 역사의 특히 중요한 점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2개의 흐름이 용출했던 것이다. 분명 형이상학문체론의 각각의 다른 배분의 양식이었을 두 개의 흐름, 플란톤주의와 견유학파라는 두 개의 흐름이. 플라톤주의는, 이 세계의 배후나 위에 참된 세계를 전제한다. 감각적인 세계를 초월한 순수한 형상의 세계를 전제한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적으로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 ‘저 세상에서의 영생이다. 그러나 견유학파에게 문제가 된 것은 저 세상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삶의 문제이다.’ 이 세계에서의 다른 삶이 문제로 되고, 그리고 그 다른 삶이야말로 그들에게 참된 삶인 것이다. 거듭 인용하자. 견유학파의 질문은 이렇다. ‘삶이 진실로 진리의 삶이기 위해서는 다른 삶이, 래디컬하게 또 역설적으로 다른 삶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의 삶은 다른 삶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참된 삶은 다른 삶이다.’ 플라톤주의에서처럼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도 아니고,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도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다른 삶을’ ‘유일한 세계에서 다른 삶을, 영원히추구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참된 삶이 다른 삶의 원리가 되는 운동인 한, ‘견유학파는 어쨌든 서양에서의 근본적인 윤리적 경험의 모태이고, 배아를 구성한다.’ 참된 삶을, 즉 다른 삶을 추구하는 것. 여기에 고대철학으로부터 중세의 영성, 그리고 현대의 운동을 관통하는 견유학파적 전투주의가 존속한다. ‘다른 삶인 참된 삶, 전투의 삶. 세계를 바꾸기 위한.’

 

()물론 주지하는 대로 기독교 영성은 깊숙이 플라톤주의적이고, 그것은 이 세계에서 다른 삶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생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푸코도 기독교 영성에 대해서는 유보해 둔다. 곧 기독교 영성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세상이고, 그곳에서는 이 세계를 바꾸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푸코에게는 항상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적어도 저항운동으로서의 신비주의에 대한 일정한 평가가 있다. 이 강의에서도 기독교에서의 파르헤지아 개념의 분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과 직접 마음을 통하게 영혼을 교류시키려는 신과의 파르헤지아적 태도와, 그 같은 태도를 비난해야만 할, 건방진, 오만한행동이라고 하는 반 파르헤지아적 태도가 존재했다. 그리고 후자가 주도권을 쥐고 사목권력의 담당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전자의 신에의 파르헤지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말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비주의가, 신비체험이 오랫동안 어렵사리 지속해온 것은 신을 향한 신뢰의 파르헤지아적인 한 극단이 살아남았다는 것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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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바

2017.11.12
14:20:23
(*.206.240.214)

p 394-396  건달바 (보론)


くぎょう [苦行]

じしょう[事象]사상; 사실과 현상(現象)

むいちもつ、むいちぶつ[無一物] 무일물, 빈털털이, 맨주먹, 무일푼

ほうろう [放浪]     まずしさ[さ]

かれら[ら·彼等]     ぬし[] 

こすい [鼓吹]고취.=鼓舞.

ぼろ[襤褸]1넝마; 누더기. 2낡은 것; 고물. 3허술한 데; 결점.

たいはい[退·頽廃]퇴폐.(=頹唐·デカダンス)

らぎょう [裸形] 

なおも[も]계속해서; 더욱더; 아직도.(=さらに)

かっき[]がみ[]ちている활기차다. *みちる[ちる·ちる]차다.

こんせき [痕跡]흔적     けんちょ [顕著]현저

てんしょう[転生][불교]전생. 환생(還生); 바뀌어 다시 태어남.

ありかた[]본연의[이상적인] 자세[상태].

きばん [基盤]     らんぼう [乱暴]     はれんち [破廉恥]

かつて[て·て]1일찍이; 예전부터; 전에(예스로운 말씨).(=以前)2(否定하는 말을 수반하여) 전혀; 전연.

べんぎ [便宜]편의

militantisme [militɑ̃tism] (프)(조직·활동가 따위의) 전투적인 태도

おおやけ[]1공. 2조정; 정부; 국가; 관청; 조직체. 3사유가 아님; 공유; 공공; 공중.

しゃこう [社交]

*フォントヴロー修道院 Fontevraud Abbey 퐁트브로 수도원 :중세 봉건시대에 프랑스 서부 ‘앙주 Anjou’ 지방과 ‘브르따뉴 Bretagene’ 지방에서 ‘가난한 이들의 대변자’로 불리던 수도사 ‘아흐브리쌜 Robert d’Arbrissel’(1050-1117)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따른다. 교황의 설교자로 공식 임명되어 방랑 수행자로 설교를 하면서 떠 돌아다니는데, 그의 신앙과 설교자로서의 명성에 힘입어 수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자, 데브로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불리던 ‘퐁뗀느 데브로 Fontaine d’Evraud’에 정착하여 노동과 기도를 중심으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건립한다. 앙주 지방의 풀끄 5세 공작의 후원을 받아 급성장하였고 플랑타즈네Plantagenets 가문이 영국 왕에 등극한 뒤 영국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수도원으로 번성. 헨리2세, 그 아들 사자심왕 리차드 1세, 딸 잔느, 부인 알리에노흐의 무덤이 있고 그 후손들도 이곳에 묻히게 된다.




  ‘진리의 살아있는 스캔들로서의 생존의 형식, 이것이야말로 견유파의 핵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일(사태)을 명확하게 하면서, 그는 우선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견유파를 찾아낸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행과 견유적인 단련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있다면서 먼저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 현상을 지적한 후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가 ‘그 무일푼, 그 방랑, 그 가난, 그 구걸’에서 어떤 점에서는 ‘중세 그리스도교단의 견유파’였다고 말하고, 도미니끄회의 수도사도 마찬가지였고 그 증거로 그들은 ‘주인의 개(Domini canes)’라고 자칭했다고 말한다. 또는 퐁트브로 수도원의 창립자인 프랑스서부의 그리스도교 영성의 고취자 아흐브리쌜의 로베르토의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마을에서 마을로 걷고 성직자의 퇴폐와 싸움(투쟁)’이라는 묘사에서 그리스도의 나형에 대한 준거와 함께 ‘견유파의 나형에 대한 준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정말이지(참으로) 그리스도교의 견유파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제도적인 견유파이고 반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견유파가.  더욱더 활기에 찬 그 형식, 그 흔적은 종교개혁의 전야에 현저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중에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내부에서도,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의 내부에서도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교 견유파의 오랜 역사를 기술할 수 있겠죠.’ 여기에서 이미 뭔가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계속한다. 다음으로 견유파의 환생으로서 그가 든 것은 ‘혁명’이다. 그것도(게다가) 근대의.

  ‘좀 더 우리에 가까운 곳에 서서 보면 견유파적인 본연의 자세의 다른 기반을 흥미깊게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진리의 스캔들 속에 있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견유파를 말이죠. 그것은 종교적인 제도나 실천 속에는 더이상 없는, 정치적인 실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거기에서 다양한 혁명운동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견유파라는 것은 진리의 난폭한, 폭력적인, 파렴치한 표명인 삶의 양태에 관한 사상이고, 그것은 혁명적 실천의 일부를 지금도 이루고 있고 이전에도 이루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 내내 혁명운동에 의해 채용된어 온 모든 형식의 일부도요. 근대 유럽 세계의 혁명이란--이것에 관해서는 아마 작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해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만--단순히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것은 또한 삶의 형식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견유파의 혁명. ‘혁명적 활동으로서의 삶’을 편의적으로 ‘전투주의(militantisme)’로 부른다면 이라고 푸코는 말을 잇는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있어서 그것은 세개의 형식을 취했다. 첫번째는 공식적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사교집단으로서의 ‘비밀결사’, 두번째는 공식적으로 인지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 그리고 푸코는 세번째 것을 중시한다. 이렇다.


인디언

2017.11.12
22:57:28
(*.186.81.96)

401-403(인디언)


こうしゃ [後者]

ぜんしゃ [前者]

きょうこ [強固·鞏固]

しゅちょう [主張]

いくえ [幾重] 겹겹, 여러겹

かさなる[重なる] 포개지다, 겹치다, 거듭되다

てんぷく [転覆·顚覆]

りつげん [立言] 의견을 말함, 그 의견

ひるがえす [翻す]1.뒤집다; 번복하다. 2.(깃발 따위를) 나부끼게 하다; 휘날리다

たいじ [対峙] 대치

らぎょう [裸形] 나신, 알몸

ぼうじ [房事] 성교

はばかる[憚る] 거리끼다, 꺼리다

ちぶ[恥部]

きょうする[供する]제공하다, 대접하다, 내놓다

きをくばる[気を配る] 마음을 쓰다, 배려하다, 주의하다

なおざり[等閑] 등한, 소홀

かんさつ [観察]

いる[居る] 1.있다((a)살고 있다; (b)머무르고 있다). 2.앉다. 3.(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

まずしい [貧しい]

あかはだか[赤裸] 알몸뚱이; 전라(全裸).

いいはる [言(い)張る]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버티다; 우겨대다.

けっしょう [結晶]

ゆきづまり[行き詰(ま)り] 막다름, 막다른 곳

しゅんじゅん [逡巡] 망설임

しこうさくご [試行錯誤]

とっぱこう [突破口] とっぱこうをひらく [突破口を開く]돌파구를 열다

くわだて [企て]기획, 기도, 계획

おくふかい[奥深い] 깊숙하다, 뜻이 심오하다

ていりゅう [底流]


------------------

   이리하여 푸코는 고대로부터 근대로, 그리스로부터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성, 근대의 혁명운동과 근현대예술의 실험으로 연속해서 이어지는 개의 모습, 그 투쟁의 집요한 지속을 찾아내는 것이다. 반복한다. 저 단절과 절단의 사람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주권권력과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을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특히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을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후자가 전자를 대체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어느 때 갑자기 규율권력의 ‘감시’하는 주체는 주권자라고 스스로의 논리를 겹겹으로 포갠 절단의 연속을 한순간에 전복시킬지도 모르는 말을 했었다. 주권권력과 규율권력, 생명권력이, 그때까지의 주장을 모두 번복하기라도 하듯이, 한 시대에 겹칠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야말로 알아차려야할 것이 있다. 대왕에게 두려움없이 대치하는 이 개의 삶을 푸코는 ‘주권적인 삶’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견유학파는 거의 알몸이고 방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앞에서 꺼리지 않고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 ‘가시성’안에 있었다. 공중의 눈앞에서 태워지기를 바라기조차 했던 페레그리누스(순례자)를 형용하는 푸코 자신의 말에 의하면, ‘견유학파적 삶의 절대적 가시성’ 안에. 개는 다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치부를, 성을,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개는 또한 ‘감시’한다. 분명히 푸코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견유학파는 자신의 전부를 사람들의 시선에 제공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전부를 감시하는 자이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인간에 대해 감시를 행사합니다. 인간이 하는 것을, 어떻게 살고있는가를, 무엇에 마음을 쓰고, 의무에 반하여 무엇을 소홀히 하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타자를 시찰하고, 감시하는 것, 타자를 향한 시선. 여기에서야말로 진리 실천의 다른 기능이, 다른 양태가 있는 것입니다.’ 견유학파의 감시, 즉 ‘자기에의 감시는 타자에 대한 감시이기도 하다’ ‘타자에의 감시는 자기에의 감시이기도 하다.’ 개는 감시당한채로만 있지는 않는다.개는 감시한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가난하고 알몸인 반항하는 주권자인 개 감시 이다. 여기에서는 푸코가 오랫동안 그것이 양립할 수 없다고 우겨왔던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이, 후에 그도 인정한 것처럼 양립가능한 것으로, 그러나 새로운 하나의 다른 형태의 결정체로 되었다.

   그리고 그는 78년 2월 1일, 기묘한 막다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망설임과 시행착오 끝에 갑자기 ‘통치성’이라는 말을 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시도를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통치성’의 논리와 함께 도출된 ‘사목권력’은 그리스는 고사하고 헤브라이의, 아니 그 이전의 오리엔트문명으로부터 아득히 길게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초역사적’이라고는 스스로 형용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절단의 깊숙한 바닥에 흐르고 있는 어떤 집요한 지속을 이미 찾아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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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17.11.13
08:26:25
(*.126.164.135)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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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버기

2017.11.13
08: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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