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야기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 ]


리셋하다, 전환이 시작되었다

    



 

글 : 새털





밀양X문탁 인문학 캠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점필재 연구소> 정출헌샘의 강의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나에게는 같은 날 오전에 있었던 손희정 평론가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읽는 이야기책> 강연도 인상 깊었다. 손희정샘의 강의는 인문학캠프와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열리는 너른마당의 달공’(한 달에 한 번 공부한다는 뜻의) 프로그램이었다. 금요일 저녁 토론회에서 문탁 사람들은 너무 공부만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곽빛나씨가, 다음날 아침 손희정샘 강의를 들으러 쪼르륵 달려가기에 나도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우리 보곤 왜 그렇게 공부 많이 하냐고 하면서, 토요일 오전부터 무슨 공부예요?” 나는 곽빛나씨에게 힐난 아닌 힐난을 던졌고, “! 이건 한 달에 한 번 하는 공부예요!”라고 곽빛나씨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나는 곽빛나씨의 뒤에 앉아 영화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재난과 파국이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지구를 구하는 과학자로 열일을 했던 1998년의 <아마겟돈>과 봉준호 감독이 백인남성이 아니라 동양인소녀와 흑인소년을 지구의 생존자로 설정한 2013년의 <설국열차>와 문명이 파괴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사냥꾼으로 살아가는 파국 이후를 다룬 2010년의 <더 로드>까지, 이날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발표된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대표작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강의에서 손희정샘은 두 편의 영화를 꼭 보라 추천했다. 앞에서 언급한 <더 로드>2012년에 발표된 <멜랑콜리아>. 손희정샘은 최근 재난영화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제까지 재난영화들은 어떻게든 파국을 막아내는 방식이었다면, 두 편의 영화에서 파국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기정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 지구의 재난과 파국은 미국의 대통령이나 머리 좋은 과학자, 재력 있는 히어로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범주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자행한 사악한 일들을 생각하면, 지구의 파국을 막아내는 일 자체가 정의가 아닐 수 있다는 성찰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멜랑콜리아.jpg


밀양에서 돌아와 몇 주를 보내고, 몇몇 사이트를 거쳐 맥스무비에서 <멜랑콜리아>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심지어 넷플릭스에도 가입했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매번 회원가입을 하는 번거로움과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다시 인증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보게 된 <멜랑콜리아>는 멋진 영화였다. 지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던 멜랑콜리아행성과 지구는 충돌할 것인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것인가? 영화는 과감하게 지구와 행성의 충돌을 화면으로 담아내고 있다. 위기의 순간을 비명과 화염과 폭발과 함께 표현했던 재난영화의 관습과 결별하며 <멜랑콜리아>는 파국의 순간을 바그너의 음악과 함께 고요히 끝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의 파괴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래...지구가 끝장날 수 있구나...세상을 리셋할 수 있구나...이런 생각의 전환과 감수성의 전환을 <멜랑콜리아>는 선취하고 있다.

전환은 쉽지 않다. 습관과 생각과 관습이 바뀐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일만큼이나 어렵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습관도 생각도 바뀔 수 없을 것 같은 을 느낄 때가 많다. 2014년 문탁에서 76.5일 탈핵릴레이를 시작했을 때, 2015년 광화문에서 녹색당 탈핵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오로지 스마트폰에 장착되어 있었다. 핵발전의 위험, 원자력 신화의 거짓말, 송전탑 때문에 흘린 밀양 할매들의 눈물까지 어느 것 하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전달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전단지를 받고 가방에 넣어버리는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가 벽이었다. 2016년 수지구청 올리브영 앞으로 탈핵집회를 옮겨오면서 동네 노인들이 자주 우리에게 훈수를 두셨다. 훈계와 호통 그리고 고생한다는 훈훈한 격려가 뒤섞인 애매모호한 얘기들이 오고갔다. 그리고 대통령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더 자주 피켓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노인뿐 아니라 풋풋한 20대도, 애 키우는 엄마들도, 우리 남편 같은 중년의 아저씨들도 피켓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보탠다. 올리브영 앞에서 나는 최근 어떤 변화를 느낀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하나의 사건이다. 8월 초 갤럽조사에서 계속건설 40%, 건설중단 42% 오차범위 내 근소한 차이로 앞서갔던 반대의견이, 9월 초 조사에서는 계속건설 42% 건설중단 37%로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탈핵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지금은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기사를 인터넷뉴스로 읽으며 지각변동을 느낀다. 201476.5일 릴레이를 시작할 때, ‘탈핵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에게 입력이 되지 않았다. ‘탈핵은 대중적인 용어가 아니니 핵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를 쓰자는 의견이 자주 논의되었다. 이번 공론화과정이 없었다면, 여전히 사람들은 핵발전소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 같다. 고리와 신고리 핵발전소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산과 울산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건설 중인 핵발전소를 멈출 수도 있다는 사실, 국가전력수급계획을 정부와 전문가만이 아니라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사실, 이것들에 대해 필부필부(匹夫匹婦)가 갑론을박(甲論乙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는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조회 수 :
153
등록일 :
2017.09.08
21:07:36 (*.130.92.221)
엮인글 :
http://www.moontaknet.com/mt_lifestory_board/970334/714/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www.moontaknet.com/970334

'5' 댓글

문탁

2017.09.09
09:26:26
(*.8.78.3)

아니... 이렇게 어렵게 <멜랑콜리아>를 보다니...ㅋㅋㅋ

앞으로는 일단 <필름이다> 싸장에게 문의해보세요. <필름이다>는 의외로 유스풀하답니다. ^^

요요

2017.09.09
09:53:26
(*.178.61.222)

이 글을 읽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멜랑콜리아에서도 파국의 순간에 조차 모든 것을 과학으로 판단하는 남편의 선택과 

우울과 회의와 함께 삶을 견뎌낸 여인들의 선택은 달랐던 것 같아요.(아, 물론 이것은 남녀의 성차는 아닙니다.)

<멜랑콜리아>, 내용도 내용이지만 비주얼적으로 충격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음악도 그랬었나요?^^


새털

2017.09.09
10:18:01
(*.167.33.51)

영화 전편에 바그너의 음악만을 썼다네요

그나저나 오늘 조선일보엔 공론화과정에

탈핵단체에서 반대의견으로 몰아가려는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며

공론화위원회의 전화를 꼭 받아라

당신의 반대의견이 탈핵을 앞당긴다는

가이드라인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어요

여론을 조작하다는 프레임을 만들고 있는거죠

오영샘이 탈핵집회에서 만난 어르신도 이런 조선일보의 의견에

영향을 받으신 것 같고

앞으로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자누리

2017.09.10
09:18:37
(*.238.37.229)

밀양에서 구미연할머니랑 교장선생님 차타고 이동할 때, 그날

건설반대가  우세했던 여론이 뒤집히고 있다는 기사가 한겨레에 올라왔다고

너무나 걱정하던 일이 떠오르네요.

그 분들의 근심어린 표정과 탈핵을 이제 입에 올릴 수 있게된 사람들은 분명 천지차이가 있지요.

아마 절박함의 차이가 아닐까요?

절박하지 않은데 단지 원자력발전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지각변동적인 사건이 될까요?

전 그분들만큼 절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표정이 나올것 같지도 않구요.

그래서 공론화과정이 중요하지 결과는 그다음 스탭을 위해 분명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생각이 자신이 없어요.

결과는 계속건설 쪽으로 나오면 정말 우리는 어떻게 하죠? 아니, 저보다 밀양어르신들은 어떻게 하죠?

정부가 공론화의 장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사건'이 될 수 있을지, 아니 어떤 사건이 될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도깨비

2017.09.18
21:43:07
(*.168.83.253)

영화와 문명의 전환에 관한 대비가 잠시 생각을 멈추게 하는군요.


건설중단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라 기대했었던 제게는 이런 여론 결과가 좀 충격이었죠.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탈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전기를 수급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 만으로도 큰 전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새털 샘 옆에서 그 날 같이 영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필름이다'에서 이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할 정도로 흥미 있는 영화들이 많이 소개되었었죠.


멜랑콜리아 못봐서 함께 봤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보내봅니다. ㅎㅎㅎ

문서 첨부 제한 : 0Byte/ 40.00MB
파일 크기 제한 : 40.00MB (허용 확장자 : *.*)
옵션 :
:
: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탈핵' 관련 도서 가져다주세요! 탈핵장터팀에게 [2] 녹색다방 2017-09-13 76
공지 9월16일 정희진의 페미니즘 특강 [2] file 요요 2017-09-11 302
공지 꿀잠에 집들이 선물했어요!! [1] file 주술밥상 2017-09-10 79
공지 문탁-마을경제 워크샵에 초대합니다 [40] file 자누리 2017-08-04 1104
공지 뉴미디어가 웹진 시대를 마감하고 그리스 여행기로 문을 엽니다!!! [1] 봄날 2017-07-24 201
1320 [신고리공론화⑥] 바보야, 문제는 정치라니까 [3] updatefile 관리자 2017-09-18 105
1319 오전엔 앉아서 플라톤에게 정신이 탈탈탈... 오후엔 일어나서 원전을 탈탈탈!! [3] 고은 2017-09-13 84
1318 [신고리공론화⑤] 소통과 혜안, 기대하지 말고 강제하자 [2] file 무담 2017-09-12 91
1317 스즈카 탐방 제안드려요~ [1] file 광합성 2017-09-12 64
1316 <탈핵신문>에 실린 게으르니의 글^^ [1] 요요 2017-09-11 67
» [신고리공론화➃]리셋하다, 전환이 시작되었다 [5] file 새털 2017-09-08 153
1314 간절히 바라옵건데... file 요요 2017-09-07 68
1313 [신고리공론화③] 팩트첵크는 답이 아니다 [3] file 요산요수 2017-09-06 141
1312 가을엔 무드잡을 시간이 필요하다!!!! [1] file 센치한방울 2017-09-04 92
1311 텃밭풍문-문탁엔 남자가 많다!^^ [6] file 요요 2017-09-03 124
1310 라디오에 출연한 <낭송유랑단> [2] file 관리자 2017-09-03 91
1309 <마을경제워크샵> ' 자립 혹은 자족?' - 실전편 후기 [2] file 오영 2017-09-02 78
1308 정희진의 어떤 노동 혹은 길위의 삶 [5] 요요 2017-09-02 111
1307 8월 주술밥상 이모저모 [1] file 주술밥상 2017-09-01 74
1306 일요일 오전 가을맞이 텃밭 울력~ [1] 요요 2017-08-31 49
1305 우샘의 책 출간 경축^^선물 릴레이~ [1] file 고전공방 2017-08-30 73
1304 [신고리공론화②] 제대로 공놀이를 즐기는 방법 [3] file 청량리 2017-08-30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