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마을교육워크숍 공부, 교사, 학교를 다시 생각한다 1차 : 11월11일 (토) 3시~6시 / 공부론 & 교사론    2차 : 11월18일 (토) 3시~6시 / 학교론 & 종합토론 "다르게 공부해야 다르게 살 수 있다!!"  문탁의 모토입니다. 문탁의 지난 8년간은 좌충우돌 그것을 실험해왔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밥과 우정과 공부는 함께 간다!!" 지난 8년간 우리가 매일매일 새롭게 깨닫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공부를 10대들하고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공부가 삶의 내공이 되고, 공부가 친구를 만들고, 공부가 삶을 생산하는 이 어렵지만 짜릿한 과정을 10대들하고도 해볼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부모(근대가족 안에서), 누군가의 선생(근대학교 안에서)을 넘어서, (마을에서) 10대와 연대할 것! <주권없는학교>의 지난 6년은 그것을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본  (<파지스쿨>, <초등서당>, <중고등 인문/고전학교>, <아지트여기>, <동아리프로그램>, <특강> 등)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0대와 함께 공부하는 삶의 양식을 발명하는 것은. 우리가 촉발하되 또래끼리 으쌰으쌰 자가발전시키는 공부와 활동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이건 때론 불가능한 목표같기도 합니다.) 그러던 올해 몇가지 눈에 띄는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야심차게 출발하고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던 <파지스쿨>이 모집에 실패한 반면, 문탁에서 죽치면서 문탁 내를 쏘다니는 유령같은^^ 10대들이 늘어났습니다. 파지스쿨이 없어서 가능해진 것인지, 파지스쿨의 지난고난한 세월 덕분으로 가능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이제 <주권없는학교>에서는 지난 6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쉼표(아! 마침표가 될지도)를 한번 찍어보려고 합니다. "난 10대와 공부하는 데는 관심없어"라고 말을 하는 문탁 내의 많은 '쿨한'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교육을 고민하교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데에 헌신하는 문탁 밖의 많은 '열정적인' 친구들과 함께. 공부란 무엇인지, 교사란 누구인지, 학교는 앞으로도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2017 마을교육워크숍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0대와 함께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1차시 : 공부론 & 교사론 / 11월11일(토) 3시~6시 첫번째 세션 - 공부론  (발표: 게으르니 & 여울아) 아이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억지로 보냈어요" '공부는 지겹다'가 10대 대부분의 감각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친구들과 대면하면서 출발합니다. (이게 문탁 공부와 주권없는학교 공부의 차이^^) 공부는 지겹지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공부는 특정한 배치 속에서만 지겨운 것일까요? 한편 많은 분들이 질문합니다. 도대체 인공지능시대에 왜 아이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나요? 그것도 한문으로? 외국어를 가르쳐야 하는게 아닌가요? 대안학교들도 영어 안 가르치는데는 없어요. 10대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걸까요? 10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과목(내용)은 있는 것일까요? 또 문탁에서 즐겨하는 공부법인 암송을 두고 우리 내부에서도 의견분분입니다. 그건 변형된 암기 아니야?,라는!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10대와 책읽기를 하면서 청소년용 도서를 읽게 하는 것이 좋은지, 원전을 읽게 하는 것이 좋은지 늘 헷갈립니다. 도대체 공부가 뭐길래?  우리의 경험,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눕니다.       두번째 세션 - 교사론 (발표: 노라 & 진달래) 주권없는학교에서 10대를 만나는 교사들을 우리는 마을교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가르치기에 앞서 배운다고 합니다. 아니 가르침을 통해 더 많이 배운다고 말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너희들이 배우라고 우리가 돈을 주고 아이들을 너희한테 보내는 것은 아니잖아? 너희들 공부를 위해 파지스쿨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알아야 가르치는 것일까요? 알지 못해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가르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자격증이 아니라면 교사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가르칠 수 있지만 아무나 가르칠 수 없다면 교사는 어떻게 교사가 되는 걸까요?  나아가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자격증이 아니라면 위계가 아니라면 (이건 학교교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교사간의 소통은 어떻게 할수 있을까요? 서로간의 다른 교육관, 서로간의 다른 스킬은 공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공존의 방법은? 주권없는학교 교사들 간의 살벌했던 내부투쟁을 살짝 엿보실 수도 있습니다.  2차시 : 학교론& 종합토론  / 11월18일(토) 3시~6시 첫번째 세션 - 학교론 (발표 : 뿔옹) 파지스쿨을 하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매일 수업을 하지 않는 대안학교는 매력이 없어요. 일주일에 이틀만 수업을 한다면 나머지 시간을 도대체 어쩌라구요. 한편 또 이런 질문도 많았습니다. 파지스쿨은 너무 '하드'하고 너무 '고리타분'해요. 학교공부가 싫어서 학교를 나왔는데 또 열심히 공부하라구요? 그런 학교는 매력없었요. 우리는 이런 요구들이 모순되게 느껴집니다. 한편에서는 학교태를 더 갖추라는 요구로, 한편에서는 학교태를 어떤 식으로든 더 약화시키라는 요구로 들립니다. 각각의 요구가 분명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해가 되지만 두 가지 피드백을 함께 받는 파지스쿨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근대)학교를 넘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넘는 것일까요? 당장 내년 파지스쿨을 우리는 다시 열 수 있을까요? 문탁 내에서 10대와 함께 공부하고 살아가는 형식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고민을 나눕니다. 두번째 -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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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➀]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요~ 히말라야  신고리원전 5,6호기 공론화를 해보자고 녹색다방과 추장단이 함께 모인 첫 회의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각자 관계 맺고 있는 외부 모임을 찾아가 이 사안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내려면, 설명 자료나 영상이 필요하니 그걸 나한테 만들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녹색다방에서 오래 많은 활동을 해 왔기에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내가 그 일을 해주기 바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의문들이 일어났다. 이미 많은 활동을 해 왔는데, 이번에도 또 내가? 공론화라는 것은 단순 지식전달이나, 그동안 해왔던 캠페인과는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내 의문의 배경에는 요즘 읽었던 스피노자가 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를 탐구하는 참된 방법은 관념의 획득 후에 진리의 표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자체를 적당한 질서를 가지고 추구하는 바로 그 길이다.”    진리탐구란 하나의 명확한 관념으로부터 다음의 명확한 관념이 따라 나오도록 적합한 사유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자체다. 그것이 ‘인식’이며 ‘지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처음부터 그에 관해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알기위해 처음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이야기다. 어떻게 모르는 것으로부터 아는 것이 따라 나올 수 있겠는가.  돌아보면 나는 순전히 좀 더 좋은 아이들 먹거리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살피면서 원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관심은 필연적으로 밀양의 목소리를 전하는 친구들과의 접촉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또 밀양은 이전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방사능과 원전과 연결되었고 어느 순간 동네에서 탈핵릴레이를 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렇지만 내가 원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그저 언론과 몇 권의 책에서 본 것이 전부다. <핵마피아> 영화 속 정범진 핵공학 교수에 의하면 나는 “핵공학적 지식도 없는 채 그저 소문으로 귀신을 믿는 것처럼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는” 우매한 민중이다. 그는 나 같은 이들이 국가중요사안인 원전 건설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지식수준이 그와 같지 않다고 해서, 원전에 대해 내가 뭔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인식 혹은 지성이라는 것은 사물에 대해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싸고 무수한 말들과 생각들이 오고간다. 이런 혼란이 있을 경우에 스피노자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유들을 가장 단순하게 나누어 보라고, 그러면 혼란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게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생각은 절대로 허위일 수 없으니 거기서부터 탐구의 과정을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정범진 교수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진 않지만, 내 행동의 원칙이 되며 세상에서 떠도는 말과 생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몇 가지만큼은 아주 확실히 알고 있다.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아이들이/사람들이 먹는 것이 좋은가?/옳은가?’ ‘누군가 편리한 전기를 얻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짓밟는 것이 좋은가?/옳은가?’  이런 명제들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도, 밀양의 할머니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된 속성에 비추어 본 것이며 그래서 나 자신에게 거짓일 수 없는 진실한 것이기에 단단하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리탐구의 시작 지점에 놓인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관념은 어쩌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녀야 하는 윤리적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친구들 역시 나처럼 공론화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을 뿐일 텐데, 회의자리에서 신경질을 낸 것이 참으로 머쓱하다. (다음날 나는 누군가에게 그날 내가 생리통이 심했었다고 변명 했다.) 그 뒤 내가 청송으로 또 휴가지로 돌아다니다 온 사이, 그 영상의 제작은 결국 나보다 인품과 기술력이 높은 청량리샘이 만들어 주기로 했다고 한다.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렇지만 영상이 없더라도,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나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제부터는 신고리원전 5,6호기에 대하여 혹은 원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하여 모두 다 한마디씩 해야만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 한마디의 발화가 그 다음으로 이어질 무수한 관념과 행위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내는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에. NM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③] 팩트체크는 답이 아니다        글 : 요산요수 최근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와 관련하여 ‘핵노답(핵발전에 대한 노골적인 가짜뉴스에 답하다의 준말)’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핵노답은 핵발전 찬성 쪽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대만에서 건설 중단한 원자력 발전소를 다시 짓기로 했다는 보도는 거짓이다’, ‘독일이 전기 수입국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탈핵을 결정한 뒤 독일의 이산화탄소배출량은 늘지 않았다’, ‘한국이 원자력 안전국가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등, 정말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보물 같은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기사도 기사려니와 그래픽도 아주 훌륭하다. 알아야 할 내용이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오마이뉴스의 ‘핵노답’은 핵발전에 대한 꼼꼼한 팩트체크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당시 jtbc 뉴스룸의 눈부신 활약 이후 ‘팩트체크’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말이 되었다. ‘팩트체크’에는 뭔지 모를 아우라가 있다.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세상의 온갖 네트워크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 가운데 무엇이 진짜인지 가려내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자연스레 솟구친다. 지난주에 파지사유 공동식탁에서 세 차례 진행된 탈핵퀴즈 역시 이런 시대정신이 반영된 일종의 팩트체크였다. ‘팩트체크’ 곧 ‘사실 확인’에는 사실은 파악될 수 있고, 사실만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패러다임, ‘팩트’에 대한 신뢰야말로 과학에 대한 신뢰이자 근대적 사고의 출발이 아닌가. 핵발전 찬성론자들 역시 반대론자들에게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오랜 기간 갈고 닦은 전문지식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핵발전에 대해, 국가 에너지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공론화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팩트체크에 대한 일반인들의 열정과 과학적 지식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전문가들의 태도는 같은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찬핵과 탈핵 방향은 다르지만 양쪽 모두 팩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양쪽 모두 ‘가짜뉴스’ 대 ‘팩트체크’라는 진실게임의 동일한 구도 속에 있다. 진실은 이미 주어져 있다고 전제된다. 이렇게 되면 핵발전 찬성과 반대 양쪽 중 하나는 거짓을 진짜라고 믿는 바보가 되거나 정보수집에 게으른 집단 아니면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팩트체크는 우리에게 참된 정보를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 팩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계몽의 대상으로 대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 파지사유에서 탈핵퀴즈가 진행된 사흘 동안 나는 이런 위험을 느끼고 마음이 복잡했다. 퀴즈를 만들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경험이었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론화는 신고리 5,6호기를 계속 지을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절차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공론화는 공론의 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문제를 숙고하는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론화는 에너지의 소비와 생산의 메커니즘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물론 공론화의 형식적인 결정은 시민배심원단에 들어가는 몇백명이 내리게 되겠지만, 삶의 현장 어디나 실질적인 공론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탈핵퀴즈쇼라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그런데 퀴즈쇼를 해보니 재미있기는 했지만 관심을 촉발하는 것 이상의 어떤 효과가 있을까 답답하기도 했다. 답답함의 정체를 찾다가 퍼뜩 퀴즈쇼와 같은 형식이 자칫하면 모든 것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론화에서 문제의 핵심은 핵발전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다. 공론화는 팩트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문제를 설정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핵발전을 포기할 때 전기요금이 얼마나 오를지 가능한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일 전기요금이 오른다면, 밀양송전탑투쟁과 같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핵발전소 건설 강행에 동의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이다. 전기요금이 얼마나 오를지 정확히 모를지라도 우리는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진짜 공론화이다. 그러니 공론의 장을 연다는 것은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지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에게 묻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문탁의 녹색다방에서는 매주 탈핵릴레이 1인 시위를 2년 반 넘게 계속해 왔다. 특히 동네로 탈핵릴레이를 옮겨온 이후 60여주 가까이 어떤 피켓을 들고 나가야 할지 어떤 퍼포먼스를 해야 할지 항상 고민이었다. 그런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계기로 우리는 문탁에서 늘 만나는 친구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되었다. 그러면서 탈핵퀴즈니 파지사유 1인 시위니 하는, 거리 시위와는 다른 형식을 시도해 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보다 습득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욕을 앞세우고 있다. 파지사유에서의 탈핵퀴즈도 마찬가지였다. 팩트는 사회적 실천이 놓인 맥락 속에서 직조되고 생산된다. 엄밀히 말해 팩트체크, 사실확인이란 그저 말일 뿐이다. 이미 주어진 특정 맥락 속에서의 팩트의 구성과 재구성이 있을 뿐이다. 팩트체크의 효과는 그 맥락을 재생산한다. 어떤 경우에도 팩트가 구성된 맥락을 해체하고 해석하는 실천은 팩트체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팩트가 우리 대신 생각하거나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탈핵퀴즈를 통해 고준위핵폐기물은 10만년 이상 보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질까? 무엇인가 달라지려면 스스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팩트를 둘러싼 진실게임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고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공론화는 팩트체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파지사유에서 벌어지는 공론화 퍼포먼스들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삶을 바꾸는 공부거리가 되려면 우리는 재미있는 탈핵퀴즈쇼를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9월말까지 이어질 파지사유 1인 시위에서 탈핵퀴즈쇼를 훌쩍 뛰어넘는 문탁학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NM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의 핵노답은 생각을 촉발하는 좋은 재료임에 틀림없다. 당장 클릭을 권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Issue/special_pg.aspx?srscd=0000011642&pageno=1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⑤] 소통과 혜안, 기대하지 말고 강제하자   글 : 무담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영구 중단할지 재개할지를 묻는 1차 전화 조사가 지난 토요일 종료되었다고 한다. 이제 20,006명의 응답자 중 참여 의사를 밝힌 5,981명 가운데 시민참여단 500명이 선정되어 충분한 정보 및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2차~4차 조사에 응하게 된다. 이 과정을 주관하는 공론화위원회는 10월 20일 공사 중단 또는 공사 재개에 대한 응답 비율을 포함한 최종 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민참여단 형식을 통한 공론화 과정은 정부의 독단과 밀어붙이기에 지친 우리 사회에 신선한 자극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민참여단이나 공론화위원회 모두 결정기구가 아닌 단순 자문기구라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참고해 최종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주체는 어쨌든 중앙 정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난겨울 타오른 촛불에 힘입어 이명박, 박근혜의 암울했던 9년을 떨쳐내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이기에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갖고 공론화 과정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모습을 보면 과연 이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듣는 소통의 정부이며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혜안을 가진 정부인지 걱정하게 된다. 창조과학이라는 과학 아닌 괴담을 신봉하여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말하는 뉴 라이트 성향의 사이비 종교인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지명한 후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티기로 일관하는 자세는 소통의 자세가 아닐뿐더러 산업과 과학에 대한 현 정권의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의 6차 핵실험을 빌미로 기다렸다는 듯 물리력을 동원해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모습에서 소통을 찾을 수 없고 참수부대 창설을 운위하고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 대통령에게 원유공급 차단을 주문하는 등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무참하게 끊어내면서 미국의 눈치만 보는 모습에서 험난한 미래를 헤쳐 갈 혜안을 찾을 수 없으니 이 모든 답답함이 차라리 그저 내가 아둔한 탓에 생긴 몰이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중요한 점은 공론화라는 절차에 혹하여 감시와 압박의 끈을 놓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엄청난 특권과 독점적 이익 속에 몸집을 키워 온 소위 핵 마피아 세력은 온갖 회유와 협박의 논리를 총동원해 시민참여단에 쏟아낼 것이다. 시민참여단의 의견이 압도적 공사 중단이 아닌 팽팽한 모습을 보일 경우 권고에 불과한 이 의견을 묵살하고 공사 재개 쪽으로 정부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집요한 몸부림 또한 이어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핵과 미사일, 그리고 스스로의 인사 헛발길질 탓에 혼란에 빠진 정부가 느닷없이 또 한 번 불통과 어리석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탈핵 이후의 세상에 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신고리 5,6호기의 공사가 영구 중단된다고 해도 핵 문제는 끝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고 원자로가 폐쇄된다 해도 역시 핵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폐로를 식히는 데만 5~15년이 걸리고 완전한 폐로에는 50~10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에게는 상당한 양의 고준위 폐기물 및 중저준위 폐기물이 남는다. 그 동안 원전에서 누려온 작은 이익이 실은 후손에게 빚지는 행위일 뿐이라는 지적이 있었거니와 이제 고리 1호기의 폐로 결정과 함께 정말로 이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우리 앞에 찾아온 것이다. 원전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핵무장에 필요한 플루토늄 확보를 위한 원자로 가동을 평화적 목적으로 치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인류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 방법 개발이라는 어렵고 심각한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룬 채 무작정 원자력 발전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원전 초기의 막연한 기대와 달리 고준위 폐기물의 안전한 처리 방법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우주에 내다 버리자는 제안의 황당함은 챌린저나 콜롬비아 참사로 거듭 확인되었고 고준위 폐기물을 연료 삼아 다시 핵 발전을 하여 쓰레기도 치우고 에너지도 얻는다는 고속증식로의 환상도 이어지는 실패와 사고 속에 일장춘몽이 되었다. 따라서 탈핵은 결코 문제의 해결이자 종료가 아니며 단지 문제의 확대 방지와 뒷감당의 시작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북한 핵과 공존해야 하고 동시에 폐로 및 그 안에 쌓인 방사성 폐기물과도 씨름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평화를 지켜 한반도와 전 세계가 처참한 전쟁터로 변하는 일을 막는 것이며 어떻게든 탈핵을 이루어내고 뒷감당에도 힘써 후쿠시마 같은 더 이상의 원전 사고를 막고 후손에게 물려줄 폐로와 방사성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든지 더 많은 물을 쏟아 붓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정책 당국의 소통과 혜안이 절실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를 정부에 기대하는 자세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촛불역명을 이루어 낸 다중의 지혜를 통해 정책 당국이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강제하고 국민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지혜를 배우게 만들어야 한다. 비록 공론화위원회의 설문 전화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민참여단 참여 기회 역시 사라졌다 해도 시민들끼리의 활발한 공론화는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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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퇴근길인문학> 시즌2 : 돈과 인류학 술과 함께 푸념하는 대신 책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방법, <퇴근길인문학>!! 2018년 <퇴근길인문학>에서는 가족(사랑), 선물, 길 위의 삶, 공동체를 주제로 자신의 삶에 대한 연구자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하면서 고독한 연구자가 되기보다는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아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 더 갖기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경쟁했던 사회, 더 많이 남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 순환을 존속시키려했던 사회, 채우기보다는 더 많이 비우는 사람에게 명예가 주어졌던 사회! 누구나 손해보는 걸 싫어하고,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걸까? 앞사람이 지갑을 떨어뜨리면? 우리는 대부분 별 생각 없이 얼른 뛰어가 그 지갑을 주워 준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어떤 선물로 상대방을 기쁘게 해줄까 매일 궁리하지 않는가? 사실 우리 삶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는, 그렇게 계산적이지 않다. <퇴근길인문학> 시즌 2에서는 단 2권의 책,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꼼꼼히 읽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능력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훌쩍 시간을 돌려 인류학적 관점에서 지금과 전혀 다르게 살아왔던 고대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즌 2 : 돈과 인류학 - 자본의 시대에서 선물의 시대로 <증여론>, 마르셀 모스, 한길사 <일리아스>,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숲 특강 : “서양문명의 기원, 호메로스의 서사시 ” (6/26), 홍영택 .기간 : 2018.5.29 ~ 7.17(8주), 매주 화요일 저녁 7시30 ~ 9시30 .장소 : 마을공유지-파지사유 .진행방법 : 소리내어 함께 읽기(30분) - (밑줄)발제(20분) - 토론 (60분) .마무리 : 암송 혹은 (1페이지) 에세이 .회비 : 8주 15만원 (12명) .튜터 : 뿔옹(홍영택), 봄날(민순기) .신청방법 : 비밀댓글로 자기 소개 및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회비입금이 되어야 신청이 완료됩니다. (카카오뱅크, 3333-06-0935912, 홍영택) .문의 : 뿔옹 (010-2611-5129) *문탁네트워크는 영리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회비는 공동체 유지 및 활동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이유로 회비는 세미나가 시작되면 반납되지 않습니다. 신청하실 때 충~분히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 *2018년 <퇴근길인문학> 이후 프로그램 시즌 1, 3/20 : 일과 가족 시즌 2, 5/29 : 돈과 인류학 - 자본의 시대에서 선물의 시대로 시즌 3, 8/7 : 길 위의 앎과 삶 시즌 4, 10/23 : 개인과 공동체 - 질서잡힌 카오스, 국가 있는 사회와 국가 없는 사회

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② 선생이라는 ‘일’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나를 보통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녀석들은 쌤. 딱히 그리 부르라 말한 적은 없지만 어느 사이엔가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마 녀석들이 느끼기에 이 시간은 책을 읽고 덤으로 이것저것 배워가는 시간 정도일 테고, 그것들을 가르쳐주는 나는 자동적으로 선생님이 된 것이리라. 그러니까 녀석들에게 선생이란 곧 가르쳐주는 사람인 셈이다. 헌데 때때로 드는 의문은 과연 선생에 대한 녀석들의 정의가 합당한가 하는 점이다. 수업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아이들과 시시한 잡담과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한 느낌과 인상 깊게 읽은 부분 그리고 그 까닭을 나눈다. 책 속의 질문들을 좀 더 확장시켜서 아이들에게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대단한 이론이나 획기적인 독서 테크닉 같은 것을 전수해주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만나 이렇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내가 녀석들과 하는 일의 전부다. 그럼에도 무언가 가르쳐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녀석들의 선생님, 교사일 수 있을까? 물론 교사란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육제도가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관리자로서의 역할이다. 일찍이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학교가 학생들을 훈육하고 통제하는 기술에 대하여 논하였다. 그에 따르면 학교는 줄지어 늘어선 책상, 촘촘히 짜인 시간표, 반복적인 시험과 피드백 등을 통해 학생들이 특정한 규율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키는 공간이다. 교사는 이 과정 속에서 관리자이자 평가자,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오늘날에는 특히 학생의 더욱 세밀한 면면까지 관리하도록 요구받는다. 즉, 오늘날 교사(적어도 학교 교사)는 학생에게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지식에 더하여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고 학생 개인의 일상까지 관리하는 자여야 하며, 또한 그를 위한 기술을 갖춘 전문가여야 한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학생들을 교화해내는 의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해낼수록 유능한 교사이다. 한편 학생은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는 ‘고객’인 동시에 의무적인 교육 제도를 필수적으로 이수해야하는 ‘관리대상’이다. 학생의 정체성에는 ‘공교육 서비스의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훈육 대상으로서의 의무’가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결국 교사는 학생과 이중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교육제도의 요구에 등을 떠밀려 학생들을 관리하려 할 때 학생들의 저항에 직면하고, 학생들이 소비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려 할 때 그들의 냉엄한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교실을 장악하리란 야망에 차 있던 교사는 늦든 빠르든 좌절에 맞닥뜨린다.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학교의 슬픔, 162p) 결국 교사들은 저 두 개의 위태로운 다리 사이 어딘가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교사와 다시 충돌을 빚고, 수많은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겪는 다채로운 사건들에 의해 기껏 정한 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한 노(老) 교사가 있다. 그도 모든 교사들이 겪는 고통을 겪어왔으며, 여전히 겪고 있다. 그의 수십 년 간의 교직 생활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고뇌의 연속이었다. 그의 일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고뇌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선생으로서, 어떻게 학생을 만날 것인가? 아마도 그 대답이 ‘교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또 다른 답이 되리라. 그를 알기 위해 나는 그 늙은 교사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이들과 읽을 두 번째 책으로, 늙은 교사 다니엘 페낙의 『학교의 슬픔』을 택했다. 1. 페낙은 『학교의 슬픔』을 통하여 학창 시절 자신이 구제불능의 열등생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때문일까. 자신의 교직생활에 대한 그의 회고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 학교로 인하여 고통 받는 열등생들과의 만남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어떻게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어떻게 그 아이들의 고통을 ‘치유’할 것인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결론부에서 그가 내린 답은, 뭐랄까, 읽는 이에게 얼떨떨한 느낌을 안긴다. 노련한 교사가 된 그는 열등생이었던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 열등생 페낙은 교사 페낙에게 일갈한다. “교사들은 열등생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주제에 아이들한테 어설픈 감정이입을 할 뿐이다.” 그들은 날선 대화로 서로를 할퀴며 답으로 향한다. 이렇게. 「“사회복지사가 왜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 열등생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알아? 정확히 선생님들과 똑같이 얘기를 하지. ‘그것’, ‘그것’말이야!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아요. 나는 ‘그것’에 안 맞아요. 바로 이렇게 대답한다고. 그 아이 역시 자기도 모르게 무지와 앎 사이의 끔찍한 충격에 대해 말하는 거야. 선생님들의 ‘그것’과 동일한 ‘그것.’ 학생들은 자기들이 학교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선생님들은 그런 학생들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양쪽 모두 똑같이 ‘그것’을 말하는 거야!”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 “‘감정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 당할 거야.” “…….” “…….” “…….” “사랑.”」 (학교의 슬픔, 366 ~ 367p) 이 대답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질질 끌어놓고 내놓은 대답이 겨우 ‘사랑’이라고?”, 다른 하나는 “왜 교육에서 사랑을 말하는데 린치를 당한다는 거야?” 그리고 이 질문들은 서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페낙이 기나긴 이야기 끝에 사랑이라는 답에 이른 이유는 교육에 있어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육에서 사랑을 말했을 때 린치를 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교육의 전문가가 담기에는 너무나 뻔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교사 생활을 막 시작한 젊은 교사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을 겪다가 늙은 교사에게 조언을 요청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때 늙은 교사가 ‘사랑으로 아이들을 만나라’고 조언해준다면, 단지 그 뿐이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면서도 실망할 것이다. ‘그런 뻔한 대답이나 듣고자 조언을 구한 게 아닌데.’ 통계 자료와 아동 발달 이론, 심리학에 근거한 대화 테크닉, 각종 상담 지원 제도 따위에 비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도무지 교육 전문가가 쓸 법한 단어가 못 된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과연 사랑이 답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학생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치유를 받아야 하고 학생들도 사랑으로 선생님들을 대하면 된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도 사랑으로만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점이 생긴다.” (우석이의 『학교의 슬픔』 감상문 중에서) 나는 우석이의 질문에 대해 무언가 대답해야 했다. 사랑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할까? 그건 쉬운 대답이고 틀린 대답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대답을 썼다. “사랑, 우정, 희망, 꿈. 때때로 사람들이 이러한 단어들에 넌더리를 내는 이유는 그것들이 추하거나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거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 현실감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고, 영영 닿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쓰는 사람들에 따라 제각기 뜻이 왜곡되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얼버무리는데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단어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아주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그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삶 속에서 현실 속에서 우리 손에 닿고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석이의 감상문에 단 답글 중에서) 그리고 페낙은 그가 말하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나란히 나있는 투명 유리창에 속아 꽤 많은 제비가 천장 유리에 머리를 찧는 것이다. 퍽! 기절해 카펫 위로 떨어진다. 그러면 (...)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오므린 채 기절한 제비를 감싸 안고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제 친구들 쪽으로 날려 보낸다. 부활한 새는 아직 좀 비틀거리긴 하지만 되찾은 허공 속을 지그재그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남쪽을 향해 돌진해 자신의 미래 속으로 사라진다. 나의 이런 메타포가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교육에 있어서의 사랑은 우리 학생들이 미친 새처럼 날아갈 때와 비슷하다. 날개가 부러진 제비 떼를 학교생활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 (학교의 슬픔, 369-371p) 다니엘 페낙이라는 교사는 꿈에만 젖은 이상론자도 허울 좋은 말만 떠들어대는 위선자도 아니다. 그는 오늘날 학생들이 일찌감치 소비자로서 길러지는 현실을 이해한다. 젊은 교사들이 ‘교육 전문가’ 역할만으로도 힘겨워하며 더 많은 전문적인 지원을 요구하는 현실을 이해한다. 파리 중심가의 학교들에서 점점 더 유색인 학생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이해한다. 제각기 다른 현실에 처해있는 학생들이 존재하며 그 모든 학생들이 도구화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한다. 무엇보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이 공허하게 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2. 한 사람의 말은 결코 그 사람의 삶을 넘어설 수 없다. 다니엘 페낙은 성인聖人으로 살지도 않았고 혁명가로 살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사랑하고자 했지만 성인의 무제한적인 사랑을 베풀 수는 없었고, 학교라는 공간의 통제 기능과 구속력을 이해했지만 공간 그 자체를 개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교사다. 작가이기도 하지만, 결국 단지 교사일 뿐이다. 「내 직업의 일부는 스스로를 가장 많이 포기해버린 ‘내’ 학생들을 설득해, 따귀보다는 정중한 대우가 더 영향력 있는 반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공동생활에는 구속이 따른다는 것, 숙제 검사의 시간과 날짜는 협상할 수 없다는 것, 날림으로 한 숙제는 다음날 다시 해야 한다는 것 (...) 나와 내 동료들은 절대 그들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학교의 슬픔, 206p) 그는 자신이 교사로서의 일을 해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의 규율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생활 규칙들, 시간표, 숙제, 시험이 아이들의 몸에 밸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관리자로서의 교사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한 가지를 누락시키고 있다. 교사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가 했던 일. 해야만 했던 일. 아이들과 교신하기 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일. 아마도 그곳이 틈새였을 것이다. 직무와 일상의, 일과 삶의, 공과 사의 틈바구니. 그의 사랑은 그 자리에서 움텄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직무와 일상 사이에, 일과 삶 사이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선을 그으려 한다. 우리 스스로도 그러길 바라고, 주위에서도 그것을 권장한다. 헌데 이 분할 구도에서 교사의 위치는 지극히 애매하다. 교사는 직무로서 지극히 공적으로 공정하게 아이들을 감시하고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야 하는 관리자로서 아이들과 밀접한 인간관계를,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영역이자 삶의 영역이고 사적인 영역의 관계를 형성할 것을 주문받는다. 교육 제도는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통합, 재편하려 시도해왔으며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완벽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많은 교사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 증거다. 선생으로서, 어떻게 학생을 만날 것인가? 기절한 제비를 되살려 보내는 페낙의 사랑이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일평생 수많은 문들을 두드리며 아이들과 교신하려 했을 그, 수많은 제비들을 다시 깨워 하늘 저편으로 날려 보냈을 그의 목소리는 그 경계선 자체를 흐트러트리고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장중한 울림이다. 아마 페낙 그 자신도 확실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하리라. 그래서 그는 그 행위들을, 자신이 쌓아온 시간들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만나야 할지 그 정답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어떤 만남이 될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도, 문이 영영 닫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다시 두드린다. 그것이 전부다. 「때로는 길을 따라가는데 실패하고, 몇몇은 다시 깨어나지 못해 카펫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다음번 유리창에 목이 부러지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제비들을 묻어준 정원의 깊숙한 구덩이처럼 우리 의식 속에 회한의 구멍을 남긴다. 하지만 매번 노력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학생이니까. 이 아이 혹은 저 아이에 대한 호감이나 반감(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지만!)의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 감정의 정도를 말한다는 건 너무 쉽다……. 지금 문제가 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기절한 제비는 되살려야 하는 제비일 뿐이다. 그 뿐이다.」 (학교의 슬픔, 371p) 3.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다. 일주일 한 번, 단 두 시간 아이들과 만나 대화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페낙이 그랬듯 몇 번이고 녀석들의 문을 두드릴 준비가 되어 있을까?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녀석들의 선생님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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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⑩ ] 공론화는 끝났다. 우리의 고민은 어디로 가야할까?  글 : 진달래 신고리 원자력 발전 5,6호기의 건설 혹은 건설 중단에 관한 공론화 위원회 시민참여단의 2박3일 종합 토론회가15일에 마무리 되고 이제 20일 공론화 위원회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몇 시간 남지 않았다)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단순히 찬반 투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숙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의 공론화는 새로운 방식의 의사결정 절차이다. 종합 토론회에 참여했던 시민 참여단은 공론화 결과에 상관없이 공론화 과정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토론 과정을 보면 단순히 건설 중단, 혹은 건설 재개에 따른 비용 문제 혹은 전기 요금 상승 등의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앞으로 원전의 안전성 문제, 신재생 에너지의 전력 수요 충당 가능성, 원전 폐기물 안전관리, 지역 주민의 건강관리, 원전수출로 인한 경제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리고 무작위로 선출된 시민참여단은 다양한 연령, 지역의 사람들로 이들이 함께 모여서 토론하는 것 자체가 이번 공론화 과정을 ‘세대를 넘나든 토론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낳게 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토론회에서 "원전을 짓지 않을 경우 결국 석탄발전소나 가스발전소를 지어야 하게 될 것"이라며 원전 토대 위에 신재생에너지 성장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설 재개 측과 "안전을 고려해 원자력 발전을 줄이는 추세"로 신재생에너지가 장기적으로 원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반대 측이 대립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 다 앞으로 신재생에너지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당장 전기 수급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전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갈수록 전기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만약 전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라고 물으면 깜깜한 밤만을 생각하지만 실제는 모든 것이 스톱된다고 보아야 한다. 전기는 좀 더 편리한 삶, 좀 더 쾌적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 삶의 전반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과 같은 가전제품은 마치 의, 식, 주와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과 같이 되었다.  얼마 전 친구가 전기레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써 보니 화기도 나오지 않고, 미세먼지 걱정도 없어서 훨씬 편리하다고 했다. 재미있는 건 집에서 사용하는 가스레인지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못지않게 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전기레인지를 쓰려면 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저 내 주방에서 먼지가 안 생긴다는 차이 밖에 없다. 더욱이 가스레인지는 쓰지 않을 때 끄면 되지만 화력발전소와 같은 대형 발전소는 한 번 가동하게 되면 끄고 켜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렇게 발전된 전기는 계속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발전소는 도시에 있지 않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발전된 전기는 전선을 타고 멀리 도시까지 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고압 송전탑이 만들어내는 삶의 파괴 현장을 목격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당장 공론화가 발표되는 20일 전, 4일간 광화문과 청계과정 그리고 청와대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계시다. 실제 원자력 발전이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은지를 논의하기 전, 우리는 내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나에게 오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2천 년 전 맹자는 정치의 시작을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즉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맹자의 정치는 매우 간단하다. 처자를 돌보는데 부족함이 없고, 돌아가신 조상님이 제사를 받들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나와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건설에 따른 공론화 역시, 맹자가 말한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공론화는 끝났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신고리 원자력 발전 5,6호기의 건설 중단, 혹은 원자력 발전소 폐기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에너지, 즉 전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NM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 ⑨] 이로움(利)이 아닌 의로움(義)은 어떨까? 글 : 봄날 공론화(公論化)는 사회적 맥락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다. 사전적 의미를 따져보아도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는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니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도 되는 일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입 가진 존재들이라면 누구라도 떠들어대는 가운데 그 말들이 수렴되어 그 사회의 정책으로, 또는 실천방향으로 형성되는 것이 공론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론화도 계속해서 함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공론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함께’(公)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함께 한다는 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것(私)’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사사로운 것은 아무래도 개인의 이해관계에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그것이 모여(集) 어떤 큰 흐름을 이룬다 해도 그 흐름을 좆는 것은 그 흐름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함께 할 때뿐이다. 즉, 공적인 것은 사사로운 것의 합(合)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공론화를, 다양한 개인들의 생각을 모으고 반영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끄집어내어 쓰는 어떤 잣대 때문이다. 바로 이해타산적인 태도,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자신 혹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공리주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이로움’에 부합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떤 논리가 만들어 질 때, 다양한 척도, 다양한 측면이 반영되어야 할텐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공리주의에 빠져서 그것이야 말로 유일한 합리적 사고이고 진리이며, 여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다’거나 ‘옳지 않다’고 비난의 소리를 높인다. 나는 신고리 5, 6호기 원전 건설 중단을 둘러싼 공론화도 이 ‘이익’ 프레임 속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원전 건설에 이미 많은 비용이 투입됐으니 지금 중단하면 손해가 아니냐고 말한다. 또 원전이 아닌 다른 전기생산 방식으로는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니 이 또한 손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지 따져보면 답이 나오지 않느냐고 따진다. 그러면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왕 투입된 건설비용은 새발의 피요, 앞으로 더 많은 건설비용이 국민들의 혈세로 들어갈 터이니 손해라고 말한다. 전기요금이 오를 것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계산해서 국민 각자에 그렇게 큰 손해가 가지 않는다고 되받는다. 물론 건설 중단을 주장하는 그룹은 원자력발전의 공포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이 비록 비용 면이나 발전능력 면에서 합리적이지 않더라도(이미 대체 에너지 생산기술은 원전기술에 맞먹거나 뛰어난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인간사회, 나아가 지구를 위해 원전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롭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익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한, 원전 건설을 밀어붙여야 한다, 중단해야 한다는 양쪽의 주장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 이미 3천 년 전에 맹자는 이로움(利)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세상을 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신의 나라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데 이로운 방법을 묻는 왕에게 “왕께서는 왜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인의가 사람의 마음에 고유한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공(公)적인 것이며, 이익을 따지는 마음은 나와 남이 서로 나타나면서 생겼으니 사사로운 것이다. 그러니 천리를 따르면 이롭지 않으려 해도 이롭게 될 것이니 먼저 이로움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두 강대국의 싸움을 말리려는 선비에게 맹자가 어떻게 싸움을 말릴 것인지 물었다. 선비가 그 싸움이 장차 이롭지 않음을 말하려 한다고 하자, 맹자는 ‘이로움’으로 설득하지 말라고 한다. 현자의 눈에는 이로움이 있으면 이롭지 않음이 있고, 죽을 때까지 이로움만을 누릴 수 없으며, 결국 이롭지 않음의 파괴적 결말을 맞게 되는 인간사회의 미래상이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맹자의 왕도정치, 인의의 정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바로 오랫동안 젖어있던 공리 프레임을 걷어낼 때 참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프레임이 있을까? 나는 파지사유를 만들어낼 때 우리가 공론화 과정을 거쳤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충분히 논의했고, 개인의 생각들이 충돌하고, 설득하고 설득당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것, 더구나 이로움 같은 것은 자리잡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좆아서 공론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로움이 아니라, 이런 의로움. 이 사회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땅히 해야 할 일, 의로운 일은 무엇인지, 원자력 발전이 이로운가 이롭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것이 의로운가 의롭지 않은가를 따져 물어보면 우리는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