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



지난 웹진 >

[공유지의 사상가 - 맹자] # 1회 지금, 맹자를 읽는다는 것은? 우연히 동양고전에 접속해서 지난 10년간 정말 빡세게 읽었다. 많이 배웠고,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나름 바뀌었다. 어쨌든 갈무리가 필요하다는 생각, 혹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공자님에게? 하하. 그럴지도. 하지만 우선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에게 그동안 떠들어댔던 말들을 공들여 주워 담아 전달해보려 한다. 친구들이여, 잘 읽어주길! 글 : 문탁 새털이 말한 것처럼 난 문탁에서 ‘쪼는’ 인간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힘에 부친다. ‘원로원’을 만들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다. 청년들을 핑계로 서울에도 거처를 마련하고, 문탁연수원을 핑계로 지방에도 거처를 마련하여 국내에서라도 유목하며 사는 게 꿈이다. 1. 어느 게 진짜 맹자일까? 작년에 『맹자』를 두 번째 읽었다. 사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맹자』 완독에 1년이나 걸린다는 게 가장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책들을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나 더 문제는 그렇게 다시 읽는다고 해서 맹자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할 것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처음 『맹자』를 읽을 때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에는 누가 뭐래도 원조의 아우라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공자의 함축적 문장들 – 예를 들어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혹은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같은 문장 –은 맥락을 짐작하기도 어렵고, 쉽게 해석하기도 힘들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리를 긴장시킨다. 『노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단 여섯 글자만으로도 관계자 모두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낸다. 그만큼 다층적이고 심오한 텍스트이다. 『장자』는 또 어떠한가? 그것은 진중한 내용을 경쾌한 리듬에 실어낸,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다. 『사기』는 일찍이 루쉰이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며, 운율 없는 <이소(離騷)>”(루쉰, 『한문학사강요』)라고 말한 바 있는 것처럼, 수천 년의 시공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장대한 인간사를 드라마틱하게 펼쳐내고 있는 ‘절대필법’의 텍스트이다. 그런데 맹자는? 일단 말이 많다. 제후가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대답하고, 제자가 한 가지를 물으면 백가지로 대답하는 식이다. 공자는 ‘말’을 상당히 경계했고, 유창하게 말하기(巧言)보다 차라리 어눌하게 말하는(訥言)편이 더 낫다고 했는데, 막상 공자의 제자를 자처하는 맹자는 끝도 한도 없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당대의 평가대로 그는 정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好辯)’이었다. 촌철살인의 미덕이 없는 맹자, 그것만으로도 매력반감이다. 게다가 인내심을 갖고 그 말을 끝까지 좇아보아도 대개는 ‘지당하신 말씀’ 수준이다. 심지어 가끔씩은 맹자가 뭔가를 우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사마천은 맹자를 초청했었던 어느 제후의 입을 빌어 그가 현실에 맞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迂遠而闊於事情”, 『사기』,「맹자순경열전」)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말은 많은데(好辯) 그 말이 대부분 원론적인 이야기(迂闊)라면? 너무 지루하지 않은가! 맹자의 첫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은 『맹자』는 좀 달랐다. 그는 힘의 정치가 아니라 덕의 정치를 주장했지만, 덕의 정치를 실현시킬 인물로 선택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힘 있는 군주였다. 뿐만 아니라 그런 군주의 눈에 들기 위해, 혹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거스르지 않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런 정치-외교적 수사는 자신이 곡학아세의 태도라고 비난해마지 않았던 당대의 다른 정치인들, 예를 들어 후대에 ‘종횡가’ 혹은 ‘유세가’라고 불리는 소진(蘇秦), 장의(張儀)들의 전매특허였다. 반대로 맹자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작은 나라에서 맹자는 역으로 ‘왕도정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세(勢)가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결코 ‘우활(迂闊)’한- 공허하거나 이상주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다. 공자와 맹자는 흔히 ‘공맹(孔孟)’이라고 불리며 세트로 취급당하지만 이 둘은 핵심적인 논점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공자가 춘추시대의 패자(霸者)였던 제 환공을 높이 평가한 반면 맹자는 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그를 폄하한다. 공자는 제환공을 힘의 균형을 통해 국제평화를 구축한 정치적 능력자로 본 반면 맹자는 그를 패권주의 정치의 시조로 본 탓이다. 공자를 사숙(私淑)했다면서 스스로 공자의 적통임을 주장한 맹자의 포지션을 놓고 생각해보면 이런 맹자의 입장은 좀 이상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공-맹을 하나의 유가로 엮고, 맹자와 동시대 다른 지식인들은 법가, 병가, 유세가, 도가 등으로 분별하는 것은 오히려 후대의 패러다임 아닐까? 다시 읽은 맹자에게서 난 그보다 180년쯤 앞선 공자와의 공통점만큼이나 당대의 유세가들, 심지어 동시대 인물이지만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장자와의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맹자의 스캔들. 그는 어머니 –바로 그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의 그 맹자 엄마^^- 의 장례를 호화롭게 지냈다는 비난에 줄곧 시달렸고,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했던 군주들에게 받은 화려한 선물 때문에 여러 번 문제제기를 받았다. 이에 대해 맹자는 자신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거나, 정신노동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방어를 한다. 때로는 그것이 정적에 의한 네거티브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뒤에 따르는 수레 수십대와 뒤에 따르는 수행원 수백명(後車數十乘,從者數百人, 「등문공 하」 4장)”이라는 맹자의 재력과 위세가 정말 ‘도리’에 적합한 것일까? 일단 그 평가는 유보하자. 어쨌든 맹자는 ‘상갓집 개’ 취급을 받았던 공자와는 그 처지가 사뭇 달라 보인다. 그는 당대 지식인 스카웃 시장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FA(자유계약선수) 대어’였던 것이다. 다시 읽은 맹자는 더 이상 장황하고, 원론적이고, 지당하신 말씀만 하는 아재나 꼰대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훨씬 더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때로는 종잡을 수 없고 때로는 애매한, 그런 역동적 인물로 다가왔다. 2. 존맹(尊孟)과 비맹(非孟) 사이 – 논쟁적 텍스트 『맹자』 『맹자』가 상당히 논쟁적 텍스트라는 것은 『맹자』 의 역사적 수용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우선 『맹자』는 오랫동안 경(經)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제자서(諸子書) 가운데 하나였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맹자』는 「제자략諸子略」에 속한 189가(家), 4000편의 책 중 한 권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순자는 맹자가 자질도 좋고 뜻도 크고 견문도 넓지만 성인의 뜻을 자기마음대로 전유하여 매우 치우치는 주장을 했다고 비판한다. 심오하지만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단정적이지만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게 바로 ‘속유(俗儒)’ 맹자의 학설이라는 것이다.(『순자』, 「非十二子」) 후한(後漢)의 왕충도 맹자를 비판하는데 주장의 논거가 부족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왕충, 『논형(論衡)』, 「자맹(刺孟)」) 물론 사마천 같은 경우는 힘의 논리를 부정하는 맹자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맹자』의 부침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주희(朱熹)의 논술문제이다. 주희는 백록동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맹자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그를 비판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견주며, 또 어떤 사람은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또 누구는 그의 공로가 우임금 아래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 귀취(歸趣)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대들은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해보라”는 질문을 했다.(황준걸, 『이천년 맹자를 읽다』, 45쪽) 그러나! (알다시피) 송대(宋代)에 이르러 『맹자』는 그 모든 논란을 뒤로 하고 불후의 텍스트로 등극한다. 한유(韓愈)가 시작하고 이정(二程)이 부흥시켰으며 주자(朱子)가 사서시스템의 완성을 통해 마침표를 찍은 맹자 리바이벌 프로젝트! 이후 ‘심성(心性)의 철학서’, 『맹자』는 성리학이라는 동아시아 근세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중국 현대 사상계의 거목인 리쩌허우(李澤厚)는 송명유학이 심성-도덕이론으로 유학을 개괄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심성도덕의 추상이론을 유학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원전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란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순자나 동중서의 유학을 배제하고, 외왕(外王)(=정치)의 독자적 범주에 대한 사유를 유학내부에서 차단한 것도 매우 큰 오류라고 말한다.(리쩌허우, 『학설』, 10~11쪽) 리쩌허우는 이것 때문에 중국(=동아시아)이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맹자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이 아니라 맹자의 정치철학에 방점을 찍어 독해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가 도올이다. 그는 『맹자』에서 ‘민본과 혁명’을 읽어낸다. 도올은 『맹자』가 『논어』와는 좀 성격이 다르다고 하면서 “공자가 ‘상향’의 발돋움을 한 사람이라면...맹자는 철저한 ‘하향’의 사명감이 있다. 맹자에게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민중의 고초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다.”(도올, 『맹자 사람의 길 上』, 103~104쪽)라고 주장한다. (도올의 책을 읽으면 신기한 게, 글자 속에서 도올의 표정이 읽힌다^^) 그런데 『맹자』의 왕도정치를 민본주의로 읽은 사람은 도올 만이 아니다. 도올 이전에 캉유웨이(康有爲)가 있었다. 특히 그는 서양근대정치학의 개념으로 『맹자』를 읽어나가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맹자』 ‘고국장(故國章)’의 국인(國人)을 거의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市民) 비슷하게 이해하면서 그 장의 의미를 맹자가 민권을 받아 의원을 개설하는 제도를 밝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나아가 『맹자』의 그 유명한 ‘민위귀장(民爲貴章)’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는 그 다음이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진심 하」, 1장)- 은 서양의 사회계약론을 이미 선취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올은 MB정부하에서, 캉유웨이는 반식민지로 전락해가던 청말의 정세 하에서 『맹자』의 민본주의적 성격에 주목하고 또 그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맹자가 민주의 제도를 수립한 태평시대의 법이다. 대개 나라가 되는 것은 백성을 모아 이루어지는 것이다...이른바 임금은 많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함께 공생하며 안락한 일을 맡은 자이다. 여러 백성이 함께 추대한 것으로 곧 여러 백성이 공용으로 하는 바가 된다. 마치 백성은 점방의 자본주이고, 군주는 초빙된 경영인일 뿐이다. 백성이 주인이고 임금은 손님이다.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는 노복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천하니 쉽고 분명하다. 여러 백성들이 귀의하여 이에 추대하는 것이 민주이고, 미국과 프랑스의 총통이 그들이다...지금 미국과 프랑스, 스페인 및 남미의 각국들이 모두 시행하고 있다...맹자가 진작에 발명한 것이다” (캉유웨이, 『孟子微』, 황준걸 위의 책, 519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반대로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처럼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원래 백성이 곧 정치의 근본이라고 하는 ‘민본주의’의 테제는 본래는 군주 쪽에 정치의 기점을 둔 것”으로, “그런 정치를 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군주이고 백성은 정치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미조구치 유조 등,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218쪽) 맹자 역시 “마음을 쓰는 자(勞心者)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자(治人)이고, 힘을 쓰는 자(勞力者)는 다른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治於人)”라고 말하면서 사서(士庶)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다.(「등문공 上」 5장) 그런데 이런 시각을 극단화하면 우리는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나아가 그것에 기반한 비트포겔(Karl Wittfogel)의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개념에 닿게 된다. 농업생산을 위한 대규모 관개사업을 위해서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는 전제적 정치체제의 중앙집중적인 통제가 필수적이었다고 요약되는 ‘동양적 전제주의’는 ‘노심자(勞心者)-노력자(勞力者)’ 이론의 유럽버전 끝판왕이다. 동아시아 고대를, 한쪽에서는 서양민주주의의 선취사회로, 또 한쪽에서는 정체적인 전제사회로 보는 것이다. 3. 맹자를 어떻게 읽을까? 누군가는 맹자에게서 우활(迂闊)하나 강직한 성품을 발견했고, 누군가는 맹자에게서 독선과 아집을 발견했다. 어느 시대에서는 『맹자』가 형이상학적 텍스트로 해석되었고, 또 어느 시대에서는 『맹자』가 정치학의 교본으로 떠받들어졌다. 『맹자』는 민주주의 사상의 선취자로도 전제주의 사상의 증거로도 거론된다. 사마천, 조기, 순자, 왕충, 사마광, 한유, 왕안석, 주희, 왕양명, 황종희, 대진, 정약용, 퇴계, 율곡 같은 기라성 같은 학자들 모두가 『맹자』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맹자』를 읽고 각자의 맥락에 따라 모두 다른 『맹자』를 출력시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맹자』는 어떤 것일까? 아카데미 밖에서 비전공자로서 동양고전을 읽으면서, 난 우리의 고전독해가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나는 ‘평이하고 친근한’ 동양 고전에서 일상의 교훈을 얻거나 마음의 위로를 찾는 경향, 또 하나는 12세기 주자가 구축한 ‘사서집주’라는 완결된 해석체계를 충실히 익히고 재생산하는 경향.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경향은 아카데미 안이든 밖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가 “역사 속 언어의 산물들과 다른 언어와 다른 역사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고 또 고심하기 위해 한 사람의 능력을 언어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여, 인문주의가 “이미 알고 느끼고 있는 것을 다시 공고히 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전을 포함하여 이미 만들어진 확실한 코드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들에 소란을 일으키고 재정식화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에드워드 사이드, 『저항의 인문학』, 51쪽), 힐링적 독서든 주자적 독해든, 그것들은 인문주의적 태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맹자』는 정전(正典, canon) 이전에 텍스트(text)이다. 그리고 모든 “텍스트들은 사건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만큼 세속적이며, 설혹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경우조차도 사회적 세계와 인간생활의 일부이고, 또한 당연하게도 텍스트들이 그 속에서 자리 잡고 해석되는 역사적 계기들의 일부”이다.(에드워드 사이드, 『세계, 텍스트, 그리고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읽기』, 107쪽에서 재인용) 따라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역시 세속적 지평 속에서 행해지는 사건이다.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가 구축하고 있는 지배적 힘들에 저항하면서, 전체화하는 개념들과 도그마적인 해석에서 탈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인문주의의 핵심으로서의 ‘세속적 비평’이다. 사이드는 비평가를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물론 이 때의 아마추어는 ‘알쓸신잡’이나 ‘지대넓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들은 사이드가 ‘사제계급 이론가’라거나 ‘교조적인 형이상학자’라고 부르는 전문가에 맞서, 세상과 뒤얽혀있는 채로 인칭적이고 활동적인 독해를 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독해자들! 『맹자』에 대한 모든 권위와 전제를 괄호에 넣기! 나에게 그 첫 번째 스텝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우활하다는 맹자의 전통적 이미지 너머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투하면서 종종 모순에 빠지는 맹자가 보인다. 두 번째 스텝은 공자의 충실한 계승자라는 맹자의 지위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공자 별자리의 두 번째 밝은 별이 아니라 공자와 다른 별자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보인다. 세 번째 스텝은 주자의 해석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명말(明末)의 지식인들은 이미 어느 누구도 주자의 주석을 읽지 않았다는데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대신 난 꼬뮨주의자로서 『맹자』를 읽는다. 선거를 앞두고 투표를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맹자』를 읽는다. 문탁네트워크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인지, “민주주의와 삶이 살아있는 곳”인지를 고민하면서 『맹자』를 읽는다. 그렇게 다시 발견해나가는 맹자의 삶과 사유! 그게 앞으로 내가 써나갈 나의 『맹자』이다. 일단 그 제목을 <공유지의 사상가, 맹자> 라고 부친다. NM

[플라톤이 돌아왔다 2회] 홍대에서 발견한 동굴의 비유와 서점 리스본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글 : 새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 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홍대에서 발견한 ‘동굴의 비유’ 뉴스타파 김진혁피디가 2015년에 만든 미니다큐 <꼰대와 선배>에서는 엔하위키 미러를 인용해 ‘꼰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보통 자기 세대의 가치관으로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아랫세대의 문화나 행동에 태클을 걸면 ‘꼰대질’한다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 다큐를 찾아보게 된 것은 같이 일하는 젊은이에게 “선생님 꼰대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난 후였다. “그래 나 꼰대야. 그래도 이렇게 불성실하게 일 안하고 변명하는 건 네 잘못이야!” 라고 윽박질렀지만, 내심 놀라기는 했다. 나는 꼰대인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꼰대질인가? 지적을 세련되게 해야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인가? 문제는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하지 않음’과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아랫세대의 문화나 행동’에 있다. 나는 시대변화에 둔감해서 젊은 세대의 행동을 제대로 독해할 줄 모르는 ‘꼰대’인가? 내 주변에는 꼰대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외모에 관심이 많아진 딸들이 아무렇지 않게 머리색을 바꾸고 들어오면, “안 돼!” 남편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하지 못하면서도, 노랑머리는 안 되지만 갈색머리는 괜찮다는 근거 없는 기준을 들이대 더욱 딸들의 빈축을 샀다. 남편과 딸들의 전선에서 타협은 불가능했다. 염색은 물론 타투도 안 되고, 피어싱도 안 되고, 비혼(非婚)도 안 된다는 남편의 강경한 쇄국정책에 대해 딸들은 입씨름도 하지 않았다. 아빠의 취향을 존중하겠으니 본인들의 취향도 존중해달라는 매너 있는 ‘무시’였다. ‘갓띵작’ ‘치맥각’ 등등 딸들과 눈높이를 맞춘 대화를 위해 ‘급식체’(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감성이나 말투)를 연습하는 남편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유행어를 학습으로 익혀야 하는 순간이 왔다면, 그건 그냥 ‘아재개그’지 ‘급식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연히 들른 홍대에서 나는 ‘나도 꼰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공연장을 찾아가던 중, 나는 홍대 뒷골목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되었다. 그곳의 지리는 낯설었고, 그곳을 오고가는 젊은이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공기’도 달랐다. 도로엔 거대한 편집샵들이 포진해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젊은이들이 사먹는 길거리표 간식조차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지갑에 카드 한 장 달랑 들어 있던 나는 버블티나 크레페 같은 것을 사먹지 못했다. 현금인출기를 찾으려면 옷, 화장품, 액세서리, 타로점 가게로 꽉 찬 골목길을 빠져나와야 했고, 내가 미로와 같은 그 길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출입금지’의 표시들이었고, 그것은 젊은이들과 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내가 ‘옛날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만의 동굴에 콕 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체감했다. 플라톤은 <국가> 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지식이 사실은 무지에 가까운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종종 동굴에 갇힌 자신과 만난다. 명품지갑이 멋져 보이는 이유가 디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브랜드로고 때문이고, 내 친구의 ‘씨바’와 팟캐스터 김어준의 ‘씨바’는 다른 뉘앙스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건 그냥 김어준의 ‘있어 보이는 말빨’ 때문이다. 2. 플라톤행 열차는 ‘동굴의 비유역’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연극의 무대와 같은 세트를 보여준다. 동굴이 있고 동굴의 입구엔 횃불과 물건들이 놓여있는 단상이 있다. 사람들은 동굴의 입구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결박되어 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평생 이러한 조건 속에 살고 있다면, 이들에게 ‘그림자(가상/환상)’의 세계는 완벽한 현실세계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세계의 진위(眞僞)를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년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꼰대일 리 없다는 콩깍지가 씌었던 나처럼, 그림자의 세계를 현실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가상이나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동굴의 비유’를 좀 더 살펴보자. 누군가 우연히 결박이 풀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벽으로부터 몸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을 더듬어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게 된다면, 자신이 봐오던 것이 동굴 입구의 횃불과 물건들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동굴 밖에 이르게 된다면 횃불이 아니라 태양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쉽지 않고 짧은 시간에 끝나지도 않는다. 동굴 속 어둠에 익숙한 자에게 동굴 밖의 밝음은 시력을 잃게 할 수도 있다. 그가 실명하지 않고 태양의 빛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갑자기 눈을 떠서는 안 되고 천천히 태양의 밝기에 눈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이 과정을 천천히 익힌다면 태양의 빛을 똑바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방법을 설명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을 다시 동굴 안으로 들여보낸다. 올바른 인식의 기쁨을 느낀 자가 있다면, 그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자신의 동료들과 그 기쁨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윤리의식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스토리가 동굴의 우화 속에 겹쳐진다. 모든 스토리에 반전과 갈등이 빠질 수 없듯이, 동굴로 돌아온 자에게도 위기와 갈등이 기다리고 있다. 평생 동굴의 벽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들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동료의 말을 쉽게 믿기는 어렵다.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눈이 상해서 돌아왔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쇠사슬을 풀어주며 위쪽으로 데려가려는 자는 잡아 죽일 수 있으면 모조리 죽여야 해.”(<국가> 7권 517a)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되돌아온 자는 현실 속의 소크라테스를 떠오르게 한다. 대중들은 과연 철학자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철학자는 과연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철학과 정치와 윤리가 분리될 수 없는 난제(難題)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굴의 비유는 <국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해법, 그리고 현실과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철학자의 운명과 윤리적 태도까지 동굴의 비유에는 플라톤이 해결하고자 하는 철학적 난제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이 10여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대화편을 쓰게 된 배경에는 ‘동굴 속의 아테네’가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다면, ‘정의로운/건강한’ 아테네의 공동생활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상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이상국가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동굴을 지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동굴의 비유는 <국가> 7권에 수록되어 있지만, <국가>와 플라톤의 철학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3. 소송의 시대와 철학의 선언 그리스의 수많은 폴리스 가운데 하나였던 아테네는 기원전 480년 동방의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전통강호’ 스파르타를 제치고 ‘그리스의 맹주’로 자리 잡게 된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학교’라는 수식어는 이런 아테네인들의 자긍심을 잘 보여준다. 아테네의 전성기, 그리스 전역의 지식인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탈레스 등 이오니아지역을 중심으로 세계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이전의 철학자들은 현실생활과는 동떨어진 ‘현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테네의 전성기, 새롭게 형성된 아테네의 지식세계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들은 고객을 두고서 서로 경쟁했고, 철학적인 현자들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유형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지적 순수함보다는 현실적 감각을, 영원한 진리보다는 당장의 효용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들을 사람들은 ‘소피스트(sophistês)’라 불렀다. 이들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언어, 문법, 변론술, 웅변술, 글쓰기 등 요즘으로 말해 인문교양을 가르쳤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질 때 그에 따라서 증대되는 것들 중에 법, 소송, 재판이 포함된다. 가난이 보편적인 사회에서는 소송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의 위계가 뚜렷하고 평등한 관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소송이 잘 일어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소송이란 최소한의 평등 관계가 존재하는 곳에서 성립한다. 특히 사회의 부가 축적되면 이제 싸울 일이 많아진다. 바로 이 때문에, 아테네의 전성기는 소송의 전성기였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소피스트로 프로타고라스가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거부한다. 객관성의 추구란 동일성을 함축한다. 그런데 인식 주체에 의해 사물의 본질과 가치가 달라진다면, 결국 객관성과 보편성의 근거가 사라진다. 이제 남은 것은 변화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대적인 진리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자의 상황에 따라 진리가 변화한다는 소피스트들의 논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었고, 이건 당대 아테네 시민들이 원했던 대답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문제는 나의 진리와 너의 진리가 충돌할 수 있고, 아테네의 입장과 다른 폴리스의 입장이 대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준의 상실은 분쟁과 혼란을 예고한다. 소크라테스는 시민의 전형으로 경쟁에 유능한 인간이 아니라 덕이 있는 인간을 제시한다. 이때의 ‘덕’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도덕적 선함’이 아니라 ‘탁월함’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재판과 논쟁에서 좋은 성과를 가져오는 능력이 아니라 지성의 힘에 의해 발휘되는 탁월함을 강조했다. 우리는 어떻게 탁월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탁월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탁월함의 올바른 기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잘못을 하는 까닭은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스스로에게 좋고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의 결핍 때문이라고 보았다. 스스로가 쾌락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탁월함의 올바른 기준을 알아가는 과정과 그것을 생활 속에서 단련시키는 과정인 파이데이아(paideia), 곧 교육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의 안과 밖의 대비만큼 중요한 것이 동굴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 있다. 동굴에 결박된 자들에게 주어질 자유는 족쇄의 풀려남이 아니라 어둠에 익숙한 눈을 빛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노력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때그때의 임시방편적 지식으로 대중들을 허약한 철학적 지반 위에 올려놓는 소피스트들의 반대편에 섰다. 소피스트들의 일대일 맞춤식 과외수업에 자기주도 학습으로 ‘맞짱’을 떠보겠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의 선언이다. 4. <윤식당>과 <효리네 민박>이 아니라 ‘서점 리스본’ 인기리에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윤식당>과 <효리네 민박>은 판타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스페인의 작은 섬 가라치코에서 한국식당을 차린 연예인들은 ‘그림엽서’ 같은 풍경 속에서 알콩달콩 식당을 운영한다. 외국인들에게 생소한 한식메뉴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입맛에 맞는 조리법 연구까지 <윤식당>의 사장님과 직원 일동은 정신을 쏙 빼먹고 식당일에 매달려있다. 그러나 그들의 전력투구에는 ‘짠내’ 나는 간절함이 빠져있다. 장사가 이윤을 내지 못하면,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고, 신용불량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현실적 제약들이 방송에는 빠져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윤식당>을 즐겨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실의 중력이 제거된 무중력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가기 싫은 직장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처리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볼 수 있다는 대리만족이 잠시라도 현실의 피로감을 잊게 해준다.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작은 식당을 차려보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야!” 라는 꿈을 꾸어보지만, 방송이 끝나면 우리는 신속히 꿈에서 현실로 복귀한다. 제주도 소길리에 자리잡은 <효리네 민박>에 놀려온 사람들은 줄곧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잔다. 끊임없이 먹고 자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먹고 자는’ 일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뭐 하느라 우리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하며 바쁜 일상을 쫓기듯 살고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고, 주말에도 주중처럼 연장근무를 반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보상은 제주도여행 같은 휴가이다. 제주도든 동남아시아든 유럽의 고성이든,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오로지 먹고 자는 즐거움을 위해 돈과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고 또 다시 먹고 자는 일을 잊고 과로하다 ‘힐링 여행’을 떠난다. 1박 2일 또는 2박 3일의 ‘힐링’은 혹사당하는 일상의 피로회복제가 아니라 마취제가 아닐런지. 우리가 과로하지 않는 일상과 소소한 행복을 표방하는 예능프로그램들을 불온하게 독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이 치유에 대한 ‘판타지’와 ‘사이비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한다는 점에 있다. 뽀로로 반창고가 칼에 베인 상처를 낫게 해주는 것은 뽀로로라는 캐릭터의 이미지가 아니라 반창고의 소독약과 방수기능 때문이다. 홍대 입구에서 연남동 쪽으로 걷다보면 주택과 식당들 사이 작은 공방과 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옛날사람’임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홍대투어에 나섰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서점 리스본’이다. 단독주택의 일층을 개조한 서점 리스본은 가게 앞에 뜰이 딸려 있는 ‘그림엽서’ 같은 책방이다. 서점 리스본은 서점의 규모로 봤을 때, 시중에 나오는 책들을 신간 위주로 진열한다 해도 공간이 부족한 작은 서점이다. 서점 리스본의 사장님은 우리가 독서실과 도서관에서 입시와 취업의 압박에 시달리며 들었던 ‘보석 같은’ 라디오 음악방송의 전직 작가이다. 사장님은 디제이의 오프닝멘트를 비롯해 전파를 타고 휘발되는 무수한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생활을 그만두고 싶어 서점을 차렸다고 한다. 서점 한 구석에는 책이 담긴 서류봉투들이 쌓여 있다. 택배 부칠 책들인가 했는데,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솔루션부스’라고 한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포장된 채로 한 권의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처럼 혹은 선물처럼 한 권의 책과 만나는 경험을 서점 리스본은 추천하고 있다. 작은 서점 곳곳에 보물찾기 쪽지처럼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을 숨겨놓고 있는 서점 리스본의 사장님은 서점 운영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사장님은 임대료와 관리비 그리고 책값을 어떻게 충당하고 있을까? 비축해둔 은행 잔고가 넉넉한 것일까? 플라톤 : 책 팔아서 서점 운영 못하잖아요? 어떻게 서점을 유지하세요? 리스본 : 제가 글쓰기 클럽을 운영하고 있어요. 온라인으로 한 달 회원을 받고 매일 글쓰기를 하도록 해요. 글이 올라오면 간단하게 코멘트를 해주는 방식이에요. 글을 쓰는 습관을 갖도록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준다고 할까요. 글쓰기 수업료로 월세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책을 팔아서 나는 수익으로는 새로운 책을 사고 있어요. 차차 책을 늘여가고 있어요. 이제는 거의 책장이 다 찼고 서점 통장의 잔고는 서서히 늘어가고 있어요. 제 생활비 전부를 감당할 만큼은 안 되지만 밥값 정도는 벌어주는 것 같고요. 플라톤 : 작가니까 서점 리스본의 이야기를 서점 리스본에서 써보면 될 것 같은데요? 리스본 : 서점 리스본에 대한 책은 이미 계약되었어요. 진작부터 서점에 대한 책은 제의 받고 있었지만 아직 책 한 권이 되기에는 부족했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하려고 미뤄두고 있었는데 마침 서점 리스본을 아끼는 편집자가 기획서를 써왔더라고요. 서점 리스본에 가면, 서가 다음으로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장님의 책상이다. 아니 작가의 책상이다. 서점 리스본은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의 ‘지적인 사랑’을 담은 책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의 저자이기도 한 작가의 작업실이고, 저자의 사인을 직접 받을 수 있는 서점이기도 하다. 제빵사의 이름을 내건 수제빵집처럼, 서점 리스본에는 책을 작가에게서 직접 구입하는 소소한 감동과 재미가 있다. “방금 나온 빵이에요”가 아니라 “방금 쓴 글이에요. 잘 읽어주세요.” 라는 작가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다. 서점 리스본에서 금지되고 있는 것은 사진 촬영이다. 골목길을 걷다 서점이 예쁘다며 들어온 행인들이 “사진 찍어도 될까요?” 물어본다면, 사장님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책은 읽는 것이지 사진을 찍는 소품이 아니라는 사장님의 철학이 철칙으로 준수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서점 리스본의 사진을 몇 장 갖고 있다. 수잔 손탁의 인터뷰집과 김애란의 새로운 소설집을 골라 놓고 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차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사진도 몇 장 찍게 되었다. 그러니까 서점 리스본은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아지트이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점 리스본이 문을 닫을까봐 사장님만큼 재정 상태를 걱정한다. 주택을 개조한 서점 리스본의 사진은 그림엽서처럼 예쁘다. 가라치코섬의 <윤식당>과 소길리의 <효리네 민박>처럼 사랑스럽다. 서점 리스본도 하나의 판타지일까? 힙스터들의 유행이 예쁜 카페에서 예쁜 서점으로 옮겨갔다는데, 서점 리스본도 트렌드를 앞서간 셀럽의 기획상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공간이 작가나 그의 지인들에게 ‘힐링공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글쓰기 작업-책 판매-커뮤니티’가 결합된 서점 리스본은 힐링을 위한 소품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꾸려지는 살림의 장소이다. 서점 리스본의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사람들 모두가 서점 리스본 식구들이다. 홍대에 가면 ‘과로-휴식’이라는 공식을 벗어난 살림살이가 어떻게 꾸려지는지 리얼 다큐로 보여주는 ‘동굴 밖’ 서점이 있다. 서점 리스본은 창작 능력 있는 서점 주인의 ‘재충전’의 시간을 위해 월화는 문을 열지 않는다. 우리는 곧 서점 리스본에서 판매되는 텍스트 ‘서점 리스본’과 만나게 될지 모른다. 서점에 가실 분들은 월화를 피해서 찾아주시길......NM

[플라톤이 돌이왔다 1회] 아포리아, 생각할 준비가 되었나요?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글 : 새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 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천재소녀의 OMR카드를 공유하라, 영화 <배드 지니어스>(2017년) 약속시간에 쫓겨 지하철을 타러 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교통카드를 찍자마자 전력질주로 계단을 내려가지만 전동차의 문은 곧 닫히려 한다. 탈 수 있을 것인가 못 탈 것인가? 미쳐버릴 것 같은 ‘0.0000......1초’의 짜릿함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약속에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는데, 배터리는 간당간당하고 신호가 잡히지 않아 머릿속이 하얗게 ‘번-아웃(burn-out)’되는 불안과 초조함 또한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이런 건 어떨까? 지우개로 컨닝페이퍼를 만들어 고사장에 들어갔을 때 빠른 비트로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수. 부정행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의 긴장감.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른다. 2017년 11월에 개봉한 태국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보는 내내 심장이 쫄깃해지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시험 감독관의 매의 눈을 피해 지하철역으로 도망치고, 도주중 휴대폰으로 정답을 전송하고, 부정행위의 증거물인 휴대폰을 신속히 처리하는 여고생 린의 고군분투는 긴장감 총량에서 은행을 털고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전문범죄집단의 난동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렇다. <배드 지니어스>는 속이고 훔치고 달아나는 케이퍼무비의 공식을 잘 따르고 있는 범죄영화다. 장르영화의 관습적 표현인 총격전과 피비린내 나는 죽음이 등장하지 않고, 이들이 불법적으로 유통시키려는 것이 시험답안지라는 점에서 ‘귀여운’ 범죄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훔치려는 것이 시차를 이용한 미국대학 입학자격시험 답안지라고 한다면, 이들의 일탈은 가볍지만은 않은 ‘글로벌 사기극’이 된다. 범죄영화의 고전 <오션스일레븐>(2001년)에서 조지클루니와 브레드피트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잘 생긴 범죄자들과 ‘한패’가 되어 그들의 모의와 작당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공모자가 된다. <배드 지니어스>에서도 관객들은 부정행위를 주동하는 모범생 린에게 순식간에 빠져든다. 영화는 영리한 편집으로 시계 초침소리, 시험 감독관과의 눈싸움, OMR카드에 마킹하는 순간의 떨림을 감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관객들 전원을 학창시절의 그 숨 막히는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고등학교 음악시험을 대비해서 들었을 법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바흐의 미뉴에트가 부정행위의 도구로 사용되는 영화적 발상은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과거의 추억을 소환한다. 하이든의 트럼펫협주곡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장학퀴즈’(그 음악이 오프닝시그널로 사용되었던 방송프로그램)를 떠올리는 세대가 있는 것처럼, <배드 지니어스>는 ‘나쁘지만 모두가 갖고 싶었던’ 시험 정답지에 대한 범죄욕망을 환기시키며 관객들을 공모자로 만든다. 관객들은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마술피리>의 아리아 ‘밤의 여왕’을 들으며 완전범죄를 모의하는 주인공들의 허황된 기대감과 불안을 공유하게 된다. 2. 기회비용과 리스크를 계산하라, “먼저 속이지 않으면 당하고 마는 게 인생이야” 한국에서 <배드 지니어스>가 개봉되었을 때는 수능시험을 앞둔 시점이었다. 예정대로 시험이 치러졌다면 수능을 본 수험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개봉날짜가 정해졌을 텐데, 2017년 ‘전대미문의 수능시험 연기사태’로 영화의 개봉은 수능 전에 이뤄졌다. <배드 지니어스>의 국내 흥행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태국영화라는 생소함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티켓을 끊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소비생활에 있어 철칙이 된 ‘가성비’(가격 대비 만족도)를 따져보았을 때, 정보가 희박한 태국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간과 돈을 낭비할 수 있는 ‘리스크’가 큰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스크의 부담감을 안고 <배드 지니어스>를 본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분명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라는 20자 촌평을 남겼으리라 확신한다. <배드 지니어스>는 가성비 좋은 영화다. 그리고 <배드 지니어스>는 바로 ‘가성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한다. 영화는 ‘인생의 가성비’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대학입시와 공부는 가성비 좋은 소비상품인가? 글로벌 입시부정 사건의 공범들―린, 뱅크, 그레이스, 팟은 방콕 엘리트 사립고등학교의 동급생들이다. 장학생 린과 뱅크는 학교의 입시성적을 올려줄 우등생들이고, 그레이스와 팟은 학교의 재정을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부잣집 아이들이다. 교내 연극공연을 위해서는 학점 3.5가 넘어야 하는 그레이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시작된 린의 ‘지우개부정행위’는 팟을 비롯한 부잣집 아이들에게 과목당 3천밧(한화로 10만원)을 받는 고액 알바로, 급기야 국제적인 규모의 입시비즈니스로 진화한다. 리스크가 큰 국제적인 시험이니만큼 투자자의 규모도 미국유학을 희망하는 태국의 학생들로 ‘큰 판’이 만들어진다. 우등생 린과 뱅크가 시차에 의해 4시간 빨리 시험을 치르는 시드니에서 먼저 시험을 보고 정답을 외워 태국으로 전송한다는 이들의 작전은 성공한다. 아니 반만 성공한다. 처음의 계획대로 정답은 무사히 전송되지만, 뱅크의 부정행위는 발각되고, 린의 성적은 무효처리 된다. 그렇다면 ‘똑똑한’ 아이들 린과 뱅크는 왜 이런 무모한 범죄에 가담하게 된 것일까? 장학금을 받으며 외국 유학을 갈 수 있는 ‘퍼펙트한 스펙’의 두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세탁소집 아들 뱅크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어머니를 편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소수점 이하의 원주율을 암기할 정도로 학업에 집중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린과 엮이게 되면서 장학금 수혜자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고, 린의 입시비즈니스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 뱅크를 설득하는 린의 대사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먼저 속이지 않으면 당하고 마는 게 인생이야!” 사실 이런 독한 말을 내뱉을 만큼 린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어쩔 수 없이 부정한 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강압적인 조건에 있지 않다. 린이 보기에 학교가 ‘공정하게’ 학비로만 운영되지 않고 부모들에게 뒷돈을 받고 있는 행태는, 자신이 부잣집아이들에게 정답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성’을 운운할 자격이 없는 학교가 학생에게 ‘높은 인격’을 요구하는 이중적 잣대는 린에게 교육시스템의 ‘공정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린보다 더 많이 세상을 산 사람들은 학교뿐 아니라 ‘공정성’을 기준으로 내세운 기업, 사회, 법,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린처럼 공정하지 못한 사기극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극단적인 입장에 설 수만도 없다. 린과 친구들의 사기극으로 누군가에게는 불이익이 돌아가고, 또 다시 린과 뱅크처럼 불공정한 게이머들이 늘어나게 되는 악순환이 증가될 뿐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그에 맞는 보상이 주어지리라 단순하게 생각했던 뱅크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새로운 입시비즈니스를 계획한다.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한다고 해도 월급을 모아서는 평생 만져볼 수 없는 거액의 성공보상금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되고 있다. 뱅크의 깨달음처럼 오늘날의 현실은 노력으로만은 안 된다. 공정성이 훼손된 시스템 속에서 그 공백을 들여다본 두 아이 린과 뱅크,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원칙을 지키며 노력해서 살라고, 혹은 기회가 된다면 속임수를 써서 빠른 이득을 챙기라고, 둘 중 무엇이 정답일까? 기회비용과 리스크를 따져 가성비를 계산해보자. 인생 자체가 비즈니스다. 그런데 계산이 쉽지 않다. 원주율만큼이나 끝나지 않는 계산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던 <배드 지니어스>의 긴장감은 바로 이 복잡한 계산에 있다. 속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속일 것인가, 그 리스크를 감당할 것인가, 뚝심의 노력으로 버텨볼 것인가? 이 가운데 정답은 있는가? 3. 아포리아(aporia), 생각의 내비게이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무위로 돌아갈 때 나타나는 곤란함과 당혹감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무엇을 찾아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포리아(aporia)는 항해술에서 배가 난관에 부딪게 되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관념이나 생각이 부정될 때 겪게 되는 헤어날 수 없는 난점을 가리킨다. 또는 그러한 당혹감과 마비의 상태, 또는 무지를 의식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린과 뱅크에게 닥친 일은 아마도 아포리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이 아니다. 곤란함과 당혹감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무엇’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도록 만든다. 델피신전으로부터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의 직업은 아고라를 오가는 아테네 사람들을 아포리아에 봉착하게 하는 일이었다. 우정이 무엇인지, 용기가 무엇인지, 절제가 무엇인지…… 그는 질문만 던질 뿐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그의 대화 상대자가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알던 우정은 우정이 아니구나, 용기가 아니구나, 절제가 아니구나……는 ‘무지’의 확인이다. 무지한 자의 곤란함과 당혹감이 무엇인가 알고 싶게 만드는 발전기가 된다. ‘생각’이라는 발전기의 터빈을 돌리는 것은 아포리아의 용량이다. 기원전 5세기 말,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3년)을 경과하며 아테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테네의 황금기, 도시의 번영과 함께 성장한 소크라테스는 변방의 전장에서 질문을 갖게 된다. “나는 왜 남의 집 앞마당에서 모르는 자와 목숨을 다투고 있는가?” 전쟁이 28년간 지속되면서 대의명분은 자취를 감추었고, 실리에 따른 이합집산과 배신이 전쟁터를 휩쓸고 지나갔다. 결국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나고, 아테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소크라테스는 날마다 아고라로 출근해 스핑크스처럼 질문을 던졌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곧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전쟁은 무차별적인 파괴와 살육과 함께 비탄과 철학을 가져왔다. 아테네의 황금기에 파르테논 신전과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이 꽃을 피웠다면, 아테네의 황혼기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전쟁’이라는 말은 일상어가 되었다. 취업전쟁, SNS전쟁, 다이어트전쟁, 육아전쟁, 아이돌 대격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무기경쟁’은 끝이 없다. 성적, 외모, 사교성, 인맥, 그리고 이것을 포장할 스토리텔링의 기술까지. 그런데 정말 이런 무기들이 실효성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스펙을 쌓기 위해 소비하는 우리의 시간과 돈이 합리적인 투자인지 아무도 확인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계산이 명확하지 않다는 의심이 든다면, 이제 우리는 비로소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친구들의 인스타그램을 뒤져보고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미뤄놓고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돌아왔다. 4. 철학의 정석, 플라톤처럼 철학하기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맞는다. 그의 나이는 일흔에 가까웠다. 스승의 죽음과 아테네 정치의 타락에 회의감을 느낀 스물여덟의 청년 플라톤은 10여 년간 아테네를 떠나 지중해 인근의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집트 지역을 떠돌았다. 피타고라스학파의 공동생활과 시칠리아 참주와의 인연 등 다양한 체험학습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좀 떨어진 아카데미아숲에 학당을 차렸다. 이후 그의 작업은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그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국가>, <향연> 등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들로 비로소 철학의 체계가 정립된다. 진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 폴리스의 정치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존재론, 인식론, 정치학, 윤리학이라고 하는 오늘날 철학의 범주는 플라톤의 대화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비극작품처럼 드라마로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학드라마가 동시대인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2500년간 롱런하고 있는 철학의 ‘정석’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현대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논평처럼 모든 철학적 질문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철학의 길은 플라톤과 만난다. 플라톤은 철학의 플랫폼이다. 2017년 그리스로 보름간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스 철학공부를 시작한 지 몇 해의 시간이 흘렀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걸어가면 소크라테스를 만날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지금은 학술원이 자리 잡고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실제로 가본다면, 그가 남긴 <대화편>이 더 잘 이해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모두의 짐작대로 그건 그냥 환상과 착각이었다. 그리스에서 내가 본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올리브나무와 그리스정교회의 건축물, 스파르타가 아니라 터키에 적대감을 느끼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유적으로 남은 파르테논 신전의 한 귀퉁이와 황혼에 빛나는 포세이돈 신전의 아름다운 풍광, 퇴락해가는 소도시 스파르타의 쓸쓸함 등은 여행객의 시선으로 훑고 지나간 장면들이다. 아고라에서 내가 한 일은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고르고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그리스는 서양문명의 기원이라는 후광보다는 국가부도의 위기를 넘겨가는 빠듯한 경제사정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에서 발견하지 못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생활 속에서 만난다. 평창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의 구성을 두고 정치적 이유로 선발의 공정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20대들의 반감을 신문기사로 읽었을 때. 최저임금인상이 자영업자와 알바생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인터넷뉴스를 클릭할 때……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많아진다. 이러한 팩트들을 어떻게 독해하고 판단할 것인가? 이것은 흔히 말하는 ‘팩트 체크’처럼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들,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끄집어내게 하는 사람들 모두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분신들이다.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상 속 질문들을 가지고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를 읽어볼까 한다. ‘동굴의 비유, 이데아, 철인왕, 정의란 무엇인가……’<국가>에서 플라톤이 정리하고 있는 개념들과 현실의 사건들은 어떤 의미망을 만들게 될 것인가? 무지한 자의 아포리아로 철학은 시작된다. 책 밖으로 나온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함께 ‘슬기로운 철학생활’을 시작한다. NM



문탁 & 이슈 >

2018 <퇴근길인문학> 시즌3 : ‘길’ 위의 앎과 삶 술과 함께 푸념하는 대신 책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방법, <퇴근길인문학>!! 2018년 <퇴근길인문학>에서는 가족(사랑), 선물, 길 위의 삶, 공동체를 주제로 자신의 삶에 대한 연구자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하면서 고독한 연구자가 되기보다는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아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것 또는 저것만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 것은 우리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억누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에릭 호퍼 (부둣가에서 노동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 에릭 호퍼와 기타를 들고 있는 로드리게즈 그리고 오뒷세우스) 10년간의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 오뒷세우스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히 달라진 세계를 경험합니다. 혼란스러워진 정치, 우정, 사랑, 가족, 환대의 의미 속에서 당황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퇴근길인문학> 시즌3에서는 변화된 인간상과 혼탁해진 윤리 속에서 두려워하기보다는 부딪쳐보기를 실험했던 오뒷세우스, 평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살면서 독자적인 철학자의 길을 만들어낸 에릭 호퍼와 막노동자와 슈퍼스타, 어느 위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슈가맨 로드리게즈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법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시즌 2 : '길' 위의 앎과 삶 <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숲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이다미디어 영화 “Searching For Sugar Man” .기간 : 2018.8.7 ~ 10.2(8주), 매주 화요일 저녁 7시30 ~ 9시30 .장소 : 마을공유지-파지사유 .진행방법 : 소리내어 함께 읽기(30분) - (밑줄)발제(20분) - 토론 (60분) 이번 시즌에는 <오뒷세이아>에 대한 특강이 있을 예정입니다. .마무리 : 암송 혹은 (1페이지) 에세이 .회비 : 8주 15만원 (12명) .튜터 : 뿔옹(홍영택), 봄날(민순기) .신청방법 : 비밀댓글로 자기 소개 및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회비입금이 되어야 신청이 완료됩니다. (카카오뱅크, 3333-06-0935912, 홍영택) .문의 : 010-2611-5129 (뿔옹) *문탁네트워크는 영리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회비는 공동체 유지 및 활동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이유로 회비는 세미나가 시작되면 반납되지 않습니다. 신청하실 때 충분히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 *2018년 <퇴근길인문학> 프로그램 시즌 1, 3/20 : 일과 가족 시즌 2, 5/29 : 돈과 인류학 - 자본의 시대에서 선물의 시대로 시즌 3, 8/7 : 길 위의 앎과 삶 시즌 4, 10/23 : 개인과 공동체 - 질서잡힌 카오스, 국가 있는 사회와 국가 없는 사회



특집 >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⑩ ] 공론화는 끝났다. 우리의 고민은 어디로 가야할까?  글 : 진달래 신고리 원자력 발전 5,6호기의 건설 혹은 건설 중단에 관한 공론화 위원회 시민참여단의 2박3일 종합 토론회가15일에 마무리 되고 이제 20일 공론화 위원회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몇 시간 남지 않았다)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단순히 찬반 투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숙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의 공론화는 새로운 방식의 의사결정 절차이다. 종합 토론회에 참여했던 시민 참여단은 공론화 결과에 상관없이 공론화 과정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토론 과정을 보면 단순히 건설 중단, 혹은 건설 재개에 따른 비용 문제 혹은 전기 요금 상승 등의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앞으로 원전의 안전성 문제, 신재생 에너지의 전력 수요 충당 가능성, 원전 폐기물 안전관리, 지역 주민의 건강관리, 원전수출로 인한 경제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리고 무작위로 선출된 시민참여단은 다양한 연령, 지역의 사람들로 이들이 함께 모여서 토론하는 것 자체가 이번 공론화 과정을 ‘세대를 넘나든 토론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낳게 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토론회에서 "원전을 짓지 않을 경우 결국 석탄발전소나 가스발전소를 지어야 하게 될 것"이라며 원전 토대 위에 신재생에너지 성장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설 재개 측과 "안전을 고려해 원자력 발전을 줄이는 추세"로 신재생에너지가 장기적으로 원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반대 측이 대립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 다 앞으로 신재생에너지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당장 전기 수급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전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갈수록 전기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만약 전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라고 물으면 깜깜한 밤만을 생각하지만 실제는 모든 것이 스톱된다고 보아야 한다. 전기는 좀 더 편리한 삶, 좀 더 쾌적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 삶의 전반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과 같은 가전제품은 마치 의, 식, 주와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과 같이 되었다.  얼마 전 친구가 전기레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써 보니 화기도 나오지 않고, 미세먼지 걱정도 없어서 훨씬 편리하다고 했다. 재미있는 건 집에서 사용하는 가스레인지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못지않게 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전기레인지를 쓰려면 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저 내 주방에서 먼지가 안 생긴다는 차이 밖에 없다. 더욱이 가스레인지는 쓰지 않을 때 끄면 되지만 화력발전소와 같은 대형 발전소는 한 번 가동하게 되면 끄고 켜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렇게 발전된 전기는 계속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발전소는 도시에 있지 않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발전된 전기는 전선을 타고 멀리 도시까지 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고압 송전탑이 만들어내는 삶의 파괴 현장을 목격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당장 공론화가 발표되는 20일 전, 4일간 광화문과 청계과정 그리고 청와대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계시다. 실제 원자력 발전이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은지를 논의하기 전, 우리는 내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나에게 오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2천 년 전 맹자는 정치의 시작을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즉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맹자의 정치는 매우 간단하다. 처자를 돌보는데 부족함이 없고, 돌아가신 조상님이 제사를 받들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나와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건설에 따른 공론화 역시, 맹자가 말한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공론화는 끝났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신고리 원자력 발전 5,6호기의 건설 중단, 혹은 원자력 발전소 폐기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에너지, 즉 전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NM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 ⑨] 이로움(利)이 아닌 의로움(義)은 어떨까? 글 : 봄날 공론화(公論化)는 사회적 맥락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다. 사전적 의미를 따져보아도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는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니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도 되는 일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입 가진 존재들이라면 누구라도 떠들어대는 가운데 그 말들이 수렴되어 그 사회의 정책으로, 또는 실천방향으로 형성되는 것이 공론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론화도 계속해서 함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공론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함께’(公)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함께 한다는 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것(私)’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사사로운 것은 아무래도 개인의 이해관계에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그것이 모여(集) 어떤 큰 흐름을 이룬다 해도 그 흐름을 좆는 것은 그 흐름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함께 할 때뿐이다. 즉, 공적인 것은 사사로운 것의 합(合)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공론화를, 다양한 개인들의 생각을 모으고 반영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끄집어내어 쓰는 어떤 잣대 때문이다. 바로 이해타산적인 태도,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자신 혹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공리주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이로움’에 부합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떤 논리가 만들어 질 때, 다양한 척도, 다양한 측면이 반영되어야 할텐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공리주의에 빠져서 그것이야 말로 유일한 합리적 사고이고 진리이며, 여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다’거나 ‘옳지 않다’고 비난의 소리를 높인다. 나는 신고리 5, 6호기 원전 건설 중단을 둘러싼 공론화도 이 ‘이익’ 프레임 속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원전 건설에 이미 많은 비용이 투입됐으니 지금 중단하면 손해가 아니냐고 말한다. 또 원전이 아닌 다른 전기생산 방식으로는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니 이 또한 손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지 따져보면 답이 나오지 않느냐고 따진다. 그러면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왕 투입된 건설비용은 새발의 피요, 앞으로 더 많은 건설비용이 국민들의 혈세로 들어갈 터이니 손해라고 말한다. 전기요금이 오를 것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계산해서 국민 각자에 그렇게 큰 손해가 가지 않는다고 되받는다. 물론 건설 중단을 주장하는 그룹은 원자력발전의 공포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이 비록 비용 면이나 발전능력 면에서 합리적이지 않더라도(이미 대체 에너지 생산기술은 원전기술에 맞먹거나 뛰어난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인간사회, 나아가 지구를 위해 원전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롭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익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한, 원전 건설을 밀어붙여야 한다, 중단해야 한다는 양쪽의 주장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 이미 3천 년 전에 맹자는 이로움(利)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세상을 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신의 나라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데 이로운 방법을 묻는 왕에게 “왕께서는 왜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인의가 사람의 마음에 고유한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공(公)적인 것이며, 이익을 따지는 마음은 나와 남이 서로 나타나면서 생겼으니 사사로운 것이다. 그러니 천리를 따르면 이롭지 않으려 해도 이롭게 될 것이니 먼저 이로움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두 강대국의 싸움을 말리려는 선비에게 맹자가 어떻게 싸움을 말릴 것인지 물었다. 선비가 그 싸움이 장차 이롭지 않음을 말하려 한다고 하자, 맹자는 ‘이로움’으로 설득하지 말라고 한다. 현자의 눈에는 이로움이 있으면 이롭지 않음이 있고, 죽을 때까지 이로움만을 누릴 수 없으며, 결국 이롭지 않음의 파괴적 결말을 맞게 되는 인간사회의 미래상이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맹자의 왕도정치, 인의의 정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바로 오랫동안 젖어있던 공리 프레임을 걷어낼 때 참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프레임이 있을까? 나는 파지사유를 만들어낼 때 우리가 공론화 과정을 거쳤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충분히 논의했고, 개인의 생각들이 충돌하고, 설득하고 설득당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것, 더구나 이로움 같은 것은 자리잡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좆아서 공론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로움이 아니라, 이런 의로움. 이 사회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땅히 해야 할 일, 의로운 일은 무엇인지, 원자력 발전이 이로운가 이롭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것이 의로운가 의롭지 않은가를 따져 물어보면 우리는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