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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➀]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요~ 히말라야  신고리원전 5,6호기 공론화를 해보자고 녹색다방과 추장단이 함께 모인 첫 회의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각자 관계 맺고 있는 외부 모임을 찾아가 이 사안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내려면, 설명 자료나 영상이 필요하니 그걸 나한테 만들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녹색다방에서 오래 많은 활동을 해 왔기에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내가 그 일을 해주기 바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의문들이 일어났다. 이미 많은 활동을 해 왔는데, 이번에도 또 내가? 공론화라는 것은 단순 지식전달이나, 그동안 해왔던 캠페인과는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내 의문의 배경에는 요즘 읽었던 스피노자가 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를 탐구하는 참된 방법은 관념의 획득 후에 진리의 표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자체를 적당한 질서를 가지고 추구하는 바로 그 길이다.”    진리탐구란 하나의 명확한 관념으로부터 다음의 명확한 관념이 따라 나오도록 적합한 사유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자체다. 그것이 ‘인식’이며 ‘지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처음부터 그에 관해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알기위해 처음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이야기다. 어떻게 모르는 것으로부터 아는 것이 따라 나올 수 있겠는가.  돌아보면 나는 순전히 좀 더 좋은 아이들 먹거리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살피면서 원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관심은 필연적으로 밀양의 목소리를 전하는 친구들과의 접촉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또 밀양은 이전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방사능과 원전과 연결되었고 어느 순간 동네에서 탈핵릴레이를 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렇지만 내가 원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그저 언론과 몇 권의 책에서 본 것이 전부다. <핵마피아> 영화 속 정범진 핵공학 교수에 의하면 나는 “핵공학적 지식도 없는 채 그저 소문으로 귀신을 믿는 것처럼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는” 우매한 민중이다. 그는 나 같은 이들이 국가중요사안인 원전 건설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지식수준이 그와 같지 않다고 해서, 원전에 대해 내가 뭔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인식 혹은 지성이라는 것은 사물에 대해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싸고 무수한 말들과 생각들이 오고간다. 이런 혼란이 있을 경우에 스피노자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유들을 가장 단순하게 나누어 보라고, 그러면 혼란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게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생각은 절대로 허위일 수 없으니 거기서부터 탐구의 과정을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정범진 교수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진 않지만, 내 행동의 원칙이 되며 세상에서 떠도는 말과 생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몇 가지만큼은 아주 확실히 알고 있다.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아이들이/사람들이 먹는 것이 좋은가?/옳은가?’ ‘누군가 편리한 전기를 얻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짓밟는 것이 좋은가?/옳은가?’  이런 명제들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도, 밀양의 할머니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된 속성에 비추어 본 것이며 그래서 나 자신에게 거짓일 수 없는 진실한 것이기에 단단하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리탐구의 시작 지점에 놓인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관념은 어쩌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녀야 하는 윤리적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친구들 역시 나처럼 공론화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을 뿐일 텐데, 회의자리에서 신경질을 낸 것이 참으로 머쓱하다. (다음날 나는 누군가에게 그날 내가 생리통이 심했었다고 변명 했다.) 그 뒤 내가 청송으로 또 휴가지로 돌아다니다 온 사이, 그 영상의 제작은 결국 나보다 인품과 기술력이 높은 청량리샘이 만들어 주기로 했다고 한다.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렇지만 영상이 없더라도,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나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제부터는 신고리원전 5,6호기에 대하여 혹은 원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하여 모두 다 한마디씩 해야만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 한마디의 발화가 그 다음으로 이어질 무수한 관념과 행위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내는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에. NM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③] 팩트체크는 답이 아니다        글 : 요산요수 최근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와 관련하여 ‘핵노답(핵발전에 대한 노골적인 가짜뉴스에 답하다의 준말)’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핵노답은 핵발전 찬성 쪽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대만에서 건설 중단한 원자력 발전소를 다시 짓기로 했다는 보도는 거짓이다’, ‘독일이 전기 수입국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탈핵을 결정한 뒤 독일의 이산화탄소배출량은 늘지 않았다’, ‘한국이 원자력 안전국가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등, 정말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보물 같은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기사도 기사려니와 그래픽도 아주 훌륭하다. 알아야 할 내용이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오마이뉴스의 ‘핵노답’은 핵발전에 대한 꼼꼼한 팩트체크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당시 jtbc 뉴스룸의 눈부신 활약 이후 ‘팩트체크’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말이 되었다. ‘팩트체크’에는 뭔지 모를 아우라가 있다.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세상의 온갖 네트워크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 가운데 무엇이 진짜인지 가려내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자연스레 솟구친다. 지난주에 파지사유 공동식탁에서 세 차례 진행된 탈핵퀴즈 역시 이런 시대정신이 반영된 일종의 팩트체크였다. ‘팩트체크’ 곧 ‘사실 확인’에는 사실은 파악될 수 있고, 사실만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패러다임, ‘팩트’에 대한 신뢰야말로 과학에 대한 신뢰이자 근대적 사고의 출발이 아닌가. 핵발전 찬성론자들 역시 반대론자들에게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오랜 기간 갈고 닦은 전문지식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핵발전에 대해, 국가 에너지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공론화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팩트체크에 대한 일반인들의 열정과 과학적 지식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전문가들의 태도는 같은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찬핵과 탈핵 방향은 다르지만 양쪽 모두 팩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양쪽 모두 ‘가짜뉴스’ 대 ‘팩트체크’라는 진실게임의 동일한 구도 속에 있다. 진실은 이미 주어져 있다고 전제된다. 이렇게 되면 핵발전 찬성과 반대 양쪽 중 하나는 거짓을 진짜라고 믿는 바보가 되거나 정보수집에 게으른 집단 아니면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팩트체크는 우리에게 참된 정보를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 팩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계몽의 대상으로 대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 파지사유에서 탈핵퀴즈가 진행된 사흘 동안 나는 이런 위험을 느끼고 마음이 복잡했다. 퀴즈를 만들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경험이었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론화는 신고리 5,6호기를 계속 지을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절차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공론화는 공론의 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문제를 숙고하는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론화는 에너지의 소비와 생산의 메커니즘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물론 공론화의 형식적인 결정은 시민배심원단에 들어가는 몇백명이 내리게 되겠지만, 삶의 현장 어디나 실질적인 공론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탈핵퀴즈쇼라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그런데 퀴즈쇼를 해보니 재미있기는 했지만 관심을 촉발하는 것 이상의 어떤 효과가 있을까 답답하기도 했다. 답답함의 정체를 찾다가 퍼뜩 퀴즈쇼와 같은 형식이 자칫하면 모든 것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론화에서 문제의 핵심은 핵발전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다. 공론화는 팩트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문제를 설정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핵발전을 포기할 때 전기요금이 얼마나 오를지 가능한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일 전기요금이 오른다면, 밀양송전탑투쟁과 같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핵발전소 건설 강행에 동의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이다. 전기요금이 얼마나 오를지 정확히 모를지라도 우리는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진짜 공론화이다. 그러니 공론의 장을 연다는 것은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지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에게 묻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문탁의 녹색다방에서는 매주 탈핵릴레이 1인 시위를 2년 반 넘게 계속해 왔다. 특히 동네로 탈핵릴레이를 옮겨온 이후 60여주 가까이 어떤 피켓을 들고 나가야 할지 어떤 퍼포먼스를 해야 할지 항상 고민이었다. 그런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계기로 우리는 문탁에서 늘 만나는 친구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되었다. 그러면서 탈핵퀴즈니 파지사유 1인 시위니 하는, 거리 시위와는 다른 형식을 시도해 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보다 습득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욕을 앞세우고 있다. 파지사유에서의 탈핵퀴즈도 마찬가지였다. 팩트는 사회적 실천이 놓인 맥락 속에서 직조되고 생산된다. 엄밀히 말해 팩트체크, 사실확인이란 그저 말일 뿐이다. 이미 주어진 특정 맥락 속에서의 팩트의 구성과 재구성이 있을 뿐이다. 팩트체크의 효과는 그 맥락을 재생산한다. 어떤 경우에도 팩트가 구성된 맥락을 해체하고 해석하는 실천은 팩트체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팩트가 우리 대신 생각하거나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탈핵퀴즈를 통해 고준위핵폐기물은 10만년 이상 보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질까? 무엇인가 달라지려면 스스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팩트를 둘러싼 진실게임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고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공론화는 팩트체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파지사유에서 벌어지는 공론화 퍼포먼스들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삶을 바꾸는 공부거리가 되려면 우리는 재미있는 탈핵퀴즈쇼를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9월말까지 이어질 파지사유 1인 시위에서 탈핵퀴즈쇼를 훌쩍 뛰어넘는 문탁학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NM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의 핵노답은 생각을 촉발하는 좋은 재료임에 틀림없다. 당장 클릭을 권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Issue/special_pg.aspx?srscd=0000011642&pageno=1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⑤] 소통과 혜안, 기대하지 말고 강제하자   글 : 무담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영구 중단할지 재개할지를 묻는 1차 전화 조사가 지난 토요일 종료되었다고 한다. 이제 20,006명의 응답자 중 참여 의사를 밝힌 5,981명 가운데 시민참여단 500명이 선정되어 충분한 정보 및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2차~4차 조사에 응하게 된다. 이 과정을 주관하는 공론화위원회는 10월 20일 공사 중단 또는 공사 재개에 대한 응답 비율을 포함한 최종 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민참여단 형식을 통한 공론화 과정은 정부의 독단과 밀어붙이기에 지친 우리 사회에 신선한 자극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민참여단이나 공론화위원회 모두 결정기구가 아닌 단순 자문기구라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참고해 최종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주체는 어쨌든 중앙 정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난겨울 타오른 촛불에 힘입어 이명박, 박근혜의 암울했던 9년을 떨쳐내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이기에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갖고 공론화 과정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모습을 보면 과연 이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듣는 소통의 정부이며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혜안을 가진 정부인지 걱정하게 된다. 창조과학이라는 과학 아닌 괴담을 신봉하여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말하는 뉴 라이트 성향의 사이비 종교인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지명한 후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티기로 일관하는 자세는 소통의 자세가 아닐뿐더러 산업과 과학에 대한 현 정권의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의 6차 핵실험을 빌미로 기다렸다는 듯 물리력을 동원해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모습에서 소통을 찾을 수 없고 참수부대 창설을 운위하고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 대통령에게 원유공급 차단을 주문하는 등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무참하게 끊어내면서 미국의 눈치만 보는 모습에서 험난한 미래를 헤쳐 갈 혜안을 찾을 수 없으니 이 모든 답답함이 차라리 그저 내가 아둔한 탓에 생긴 몰이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중요한 점은 공론화라는 절차에 혹하여 감시와 압박의 끈을 놓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엄청난 특권과 독점적 이익 속에 몸집을 키워 온 소위 핵 마피아 세력은 온갖 회유와 협박의 논리를 총동원해 시민참여단에 쏟아낼 것이다. 시민참여단의 의견이 압도적 공사 중단이 아닌 팽팽한 모습을 보일 경우 권고에 불과한 이 의견을 묵살하고 공사 재개 쪽으로 정부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집요한 몸부림 또한 이어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핵과 미사일, 그리고 스스로의 인사 헛발길질 탓에 혼란에 빠진 정부가 느닷없이 또 한 번 불통과 어리석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탈핵 이후의 세상에 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신고리 5,6호기의 공사가 영구 중단된다고 해도 핵 문제는 끝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고 원자로가 폐쇄된다 해도 역시 핵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폐로를 식히는 데만 5~15년이 걸리고 완전한 폐로에는 50~10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에게는 상당한 양의 고준위 폐기물 및 중저준위 폐기물이 남는다. 그 동안 원전에서 누려온 작은 이익이 실은 후손에게 빚지는 행위일 뿐이라는 지적이 있었거니와 이제 고리 1호기의 폐로 결정과 함께 정말로 이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우리 앞에 찾아온 것이다. 원전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핵무장에 필요한 플루토늄 확보를 위한 원자로 가동을 평화적 목적으로 치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인류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 방법 개발이라는 어렵고 심각한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룬 채 무작정 원자력 발전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원전 초기의 막연한 기대와 달리 고준위 폐기물의 안전한 처리 방법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우주에 내다 버리자는 제안의 황당함은 챌린저나 콜롬비아 참사로 거듭 확인되었고 고준위 폐기물을 연료 삼아 다시 핵 발전을 하여 쓰레기도 치우고 에너지도 얻는다는 고속증식로의 환상도 이어지는 실패와 사고 속에 일장춘몽이 되었다. 따라서 탈핵은 결코 문제의 해결이자 종료가 아니며 단지 문제의 확대 방지와 뒷감당의 시작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북한 핵과 공존해야 하고 동시에 폐로 및 그 안에 쌓인 방사성 폐기물과도 씨름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평화를 지켜 한반도와 전 세계가 처참한 전쟁터로 변하는 일을 막는 것이며 어떻게든 탈핵을 이루어내고 뒷감당에도 힘써 후쿠시마 같은 더 이상의 원전 사고를 막고 후손에게 물려줄 폐로와 방사성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든지 더 많은 물을 쏟아 붓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정책 당국의 소통과 혜안이 절실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를 정부에 기대하는 자세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촛불역명을 이루어 낸 다중의 지혜를 통해 정책 당국이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강제하고 국민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지혜를 배우게 만들어야 한다. 비록 공론화위원회의 설문 전화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민참여단 참여 기회 역시 사라졌다 해도 시민들끼리의 활발한 공론화는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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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지사유인문학> 7월 강의는 특별합니다.  루쉰을 색다른 방식으로 공부합니다. "우리는 루쉰과 생생하게 ‘마주치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머물렀던 곳에 가서 그곳의 하늘과 대지를 음미하고, 그의 사상과 말, 행동을 재현해 보고, 그의 텍스트를 우리 멋대로 변환해 보고, 그를 빙자하여 길 위에서 낯선 이들과 접속해 보고…그렇게 그와 우리 사이에서 새로운 신체성, 새로운 관계가 탄생되는 과정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이보다 더 기막힌 ‘루쉰 사용법’이 또 있을까? 우리의 마음을 이어주고 또 함께 길 위에 나서게 해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루쉰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루쉰, 길없는 대지> 고미숙 P8 루쉰을 만나는 또 다른 방법! 2018년 가을에 루쉰소설 읽으신 분 모아서 루쉰의 고향 ‘샤오싱’에 갑니다. 루쉰 소설 속의 백초원, 삼미서옥, 아Q가 묵었던 토곡사, 쿵이지가 마셨던 샤오싱주와 회향두, 오봉선을 타고 수향마을 ‘샤오싱’을 돌아봅시다. 샤오싱에서 루쉰을 느끼고, 루쉰을 만나고, 루쉰의 고향 음식을 먹어보고 루쉰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ㅡㅡ강사님 계획   먼저 7월 파지사유인문학 강의에서  텍스트로 루쉰을 만납니다.  강사가 직접 고생고생하며 다닌 루쉰여행기와 어디에도 없는 여행 정보는 덤입니다!! 루쉰이 궁금하신분, 루쉰의 발자취가 궁금하신분 모두 모두 신청하세요 ~~    ------------------------------------------------------------------ * 기간 : 7월 7일~7월 28일 /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12시 30분 * 텍스트 :  <루쉰, 동아시아에 살아 있는 문학> 후지소죠, 한울 아카데미                    <루쉰, 길없는 대지> 고미숙, 북드라망 *강사 : 정성미 (=노라/ 문탁네트워크 운영회원) *강의 내용 1강 샤오싱 – 아Q를 만나러 가자 2강 베이징 – 작가 ‘루쉰’의 탄생 3강 광저우 – 종루에서 머물다 4강 상하이 – 마지막 10년   신청방법 1. 댓글로 신청해주세요. 신청사연과 연락처도 남겨주세요.  전화번호 비공개를 원하면 비밀글로 써주세요 2. 회비는 6만원입니다. 입금을 해야 신청이 완료됩니다.    (단 복회원인 경우, 복사용을 원하시면 신청할 때 함께 적어주세요.)    문의 : 공일공-9118-하나 둘 팔 삼 (오영)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2 9335 17477 ( 김시연)    *문탁네트워크는 영리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회비는 강의가 시작되면 반납되지 않습니다.                 

인트로 : 정처 없는 길을 나서며 글 : 문탁 아이들의 소가 된다구? 運交華蓋欲何求,未敢翻身已碰頭. 破帽遮顏過鬧市,漏船載酒泛中流. 橫眉冷對千夫指,俯首甘為孺子牛. 躲進小樓成一統,管他冬夏與春秋. 화개운이 씌웠으니 무엇을 바라겠소만, 팔자 고치지도 못했는데 벌써 머리를 찧었소. 헤진 모자로 얼굴 가린 채 떠들썩한 저자 지나고, 구멍 뚫린 배에 술을 싣고서 강물을 떠다닌다오. 사람들 손가락질에 사나운 눈초리로 째려보지만, 고개 숙여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어 주려오. 좁은 다락에 숨어 있어도 마음은 한결같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무슨 상관있겠소. 1932년 루쉰이 쓴 <자조(自調)>라는 제목의 구체시이다. 난 2016년 여름, ‘루쉰 온 더 로드’ 프로젝트 때문에 베이징 루쉰기념관에 갔다가 이 시 전문을 처음 읽게 되었는데, 기념관 안에서 마주친 ‘민족혼(民族魂)’이라는 거대한 액자만큼이나 입구 대리석 벽면에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이 시에 뜨악했다. 이거 도대체 뭐지? 왜 루쉰을 이런 식으로?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는 베이징 루쉰기념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샤오싱 루쉰기념관에는 거대한 루쉰동상과 함께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고, 항저우고급중학교 안 루쉰기념관에도 빨간 색으로 쓰여 있었다. 중국 최고 대학이라는 베이징의 칭화대학에도, 변방의 귀주대학에도 이 글자는 커다란 상징물로 조성되어 있다. 심지어 루쉰의 다양한 ‘굿즈’에도 이 시는 단골로 등장한다. 왼쪽으로부터 베이징 루쉰기념관, 샤오싱 루쉰기념관, 항저우 루쉰기념관 이 <자조>라는 시, 특히 “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為孺子牛(사람들 손가락질에 사나운 눈초리로 째려보지만, 고개 숙여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어 주려오)”라는 열네 글자는 마오가 공산당원이 가져야 하는 태도로 거론한 이래 아주 유명해졌는데, 아이와 젊은이에 대한 루쉰의 헌신적인 사랑과 적에 대한 루신의 가차 없는 투쟁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니까 위의 열네 글자 혹은 줄여서 ‘孺子牛(아이들의 소)’라는 세 글자는 중국에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나 ‘천하위공(天下爲公)’만큼이나 중국정신을 상징하는 유명한 글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는가, 이런 해석은. 루쉰 자신은 생전에 자신은 위대한 사상이나 선전할 만한 무슨 주의(主義)를 갖고 있지 않다고, 결코 자신은 ‘전사’나 ‘혁명가’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해왔었는데 말이다. 난 차라리 이 시를, 1932년 1월28일 상하이 사변이 나자 가족을 데리고 우치야마 서점 다락방으로 급히 피난을 떠났고, 아들은 아팠고 (그때 아들 하이잉은 홍역에 걸려서 한바탕 앓았다), 엄중한 정세였으나 자신은 아들을 등에 태우고 달래는 것(孺子牛)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루쉰이, 자신의 궁색한 처지와 처량한 심사를, 예의 그 해학을 섞어 읊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럼 너무 불경스러워질까? 루쉰은 청년을 사랑했을까? 1927년 4월12일 장제스가 백색쿠데타를 일으켰다. 세상이 갑자기 살벌해졌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루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여름 스유헝(時有恒)이라는 젊은이가 루쉰에게 공개적인 질문을 한다. 루쉰 선생님 왜 침묵하십니까? 이런 상황일수록 ‘아이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라고. 얼마 후 루쉰은 유헝에게 답글을 쓰면서 자신의 침묵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공포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자신의 공포는 무엇보다 청년들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노인들이 청년을 살육한다고 생각했는데, 장제스의 쿠데타를 목격하면서 청년을 살육하는 사람은 오히려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둘째는 자신의 글이 청년의 정신을 예민하게 만들고, 그만큼 그들의 고통도 심하게 만들고, 그만큼 청년을 살육하는 자들의 변태적 쾌감을 증대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청년에게 실망했다는 고백, 또 한편으로 청년들을 미친 살육의 전쟁으로 밀어 넣는 짓은 더 이상 안 하겠다는 다짐. ‘아이를 구하자’ 같은 구호는 이제 헛소리가 되었다는 좌절과 냉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앞으로는 뭔가 써보겠다는 작은 의욕. 이 짧은 글에서 루쉰은 청년에 대해서도 글쓰기에 대해서도 복잡한 심사를 드러낸다. (1927.9.4. 「유헝 선생에게 답함」, 『이이집) 그런데 사실 청년에 대한 실망이 처음은 아니었다. 베이징 시절, 루쉰은 청년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잡지를 만들고 싶어 했고, 주변의 청년들과 의기투합했고, 1925년 잡지 『망원(莽原)』을 창간한다. 가호창홍(高長虹)도 그 시절 루쉰이 아끼고 돌봐주던 청년 중의 한 명이었다. 2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두 사람이 100번도 넘게 만났다고 하니 두 사람의 우정은 상당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루쉰이 베이징을 떠나고 1년쯤 후 가호창홍은 느닷없이 루쉰을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루쉰은 권위적이고, 『망원』을 사유화하고 있으며, ‘사상계의 권위자’라는 허울 밑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들어버렸다는 것이다. 1925년 베이징에서 창간된 <망원>, 루쉰 가호창홍 등이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랬다. 루쉰을 존경하고 루쉰에게 편지를 보내고 루쉰에게 도움을 청하는 청년들은 자주 미욱한 행동을 하거나(샤오싱의 『월탁일보』청년들) 얍삽한 제안(베이징 시절 궁주신宮竹心같은 청년)을 해왔었고, 때로는 루쉰을 뒷방 늙은이, 시대의 낙오자, 흐리멍덩한 꼰대라고 비판하고 조롱했다(1928년 상하이의 혁명문학논쟁시의 창조파 청년들). 루쉰은 어떻게 했을까? 실망하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했고, 때로는 ‘끝’을 보면서 싸우기도 했다. 루쉰이 청년을 사랑했나? 아마도. 제자들에게 헌신적이었고 젊은이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청년들에게 자주 실망했다. 그러니 루쉰이 청년을 사랑했다면, 그건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였을 것이다. 자신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오늘날 청년들과도 조우할 수 있을까? 루쉰의 글은 어렵다. 잡문(雜文)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소설들도 쉽게 읽히진 않는다. 그의 글은 복잡다단한 중국현대사와 얽히고설켜 있고, 단순화시키기 힘든 어떤 실존적 태도를 담지하고 있으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고 말하는 순간조차 중국 인문학의 오랜 전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루쉰의 그런 복합적이고 밀도 높은 글을, 어른들도 읽어내기 어려워하는 글을 지금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을까? 문탁에서는 2년 전 <파지스쿨>(문탁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대안학교)에서 처음으로 청소년들과 루쉰을 읽었다. 그 때 아이들의 질문 수준은 “복귤이 뭐예요?” “지전가게는 뭔가요?” “대구를 맞춘다는 게 무슨 말이죠?” 정도였다. 루쉰의 정신을 이해시키기는커녕 루쉰의 말귀라도 알아듣게 하려면 루쉰-단어장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런데 대 반전. 한 학기가 끝나고 공부한 것을 발표하는 날. 한 친구가 루쉰의 「작은 사건」이라는 글 전문을 암송했는데 난 정말 깜짝 놀랐다. 낭송하는 목소리, 단어나 문장 사이의 작은 숨소리만으로도 그 아이가 루쉰의 그 글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복귤’이나 ‘지전가게’ 따위를 몰라도 루쉰과 접속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위는 파지스쿨의 발표회에서의 <작은사건>암송 / 아래는 <루쉰액팅스쿨>의 쿵이지 공연 ​ 그 경험이 나를 고무시켰다. 루쉰을 많이 읽는 게 아니라 강렬하게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단 한 편의 글이라도 몸으로 읽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암송-여행-연극으로 루쉰을 읽는 <루쉰 액팅스쿨>을 열었다. 신기하게 이번에도 여러 십대들이 결합했다. 루쉰에 끌렸을 리는 만무하고 여행과 연극이 청년들의 구미를 당겼을 것이다. 첫 날, 탐색 겸 재미삼아 골든벨 퀴즈를 진행했을 때 이 젊은이들의 수준은 다음과 같았다.^^ 루쉰이 살았던 시대는?→17세기, 루쉰이 살았던 왕조는?→명나라, 1868년 일본에서 일어난 유신은?→10월 유신, 1911년 중국혁명의 이름은?→인권혁명. 가히 오답의 향연. 그런데 반전은 이번에도 일어났다. 한 친구는 루쉰이 청년들에게 했던 말, "우선 생존하고, 두 번째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셋째는 발전하라"(1925.5.8 「베이징 통신」, 『화개집』)는 말 중 생존한다는 것이 결코 구차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루쉰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정신의 마취에서 깨어나 구차하지 않게 살기! 루쉰의 그 말이 자신을 자극한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루쉰을 통해 평화는 좋은 것, 싸움은 나쁜 것이라는 평상시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싸움을 싫어하는 것은 평화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나대다’가 자기가 ‘당할 것’을 걱정해서인 듯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배틀’을 마다하지 않는 루쉰이 멋지다고 했다. 요즘 청년들이 결코 ‘토닥토닥 쓰담쓰담’ 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거라고 짐작한 건 정말 내 착각이었다. 청년들은 루쉰이 불편해서, 죽비로 얻어맞는 것 같아서, 그것이 요즘엔 너무나 희귀한 경험이어서 오히려 끌리고 있었다. 루쉰은 지금-여기의 청년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꼰대’였다. 난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일까?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의 서문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그 시간의 정처 없음을 견디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머릿속의 구상도 있고 어느 정도 자료도 있겠지만 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연성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여 알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할 것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망연자실해지는 것이란다. 심지어 갈피를 잡지 못해 손가락은 마비되고 심장은 고동치고 몸에선 신음소리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바로 ‘쓴다는 것’의 본질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그렇다. ‘루쉰과 청년’으로 뭔가 써보지 않겠냐는 고미숙샘의 제안을 덥석 물었고 바로 후회했지만 다시 물릴 수는 없었고 그 이후 계속 ‘망연자실’한 채로 있었다. 난 도대체 뭘 쓰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난 오랫동안 문탁에서 청(소)년 사업을 해왔다. 청년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었지만 성과는 늘 소소했다. 지난 몇 년간 내가 한 짓의 90%는 ‘뻘 짓’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묻고 또 물으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문탁의 친구들은 그 이유가 내가 아이들을 예뻐해서란다. 음, 내가 아이들을 예뻐하는 것은 맞지만, 그건 ‘오면 예쁘고 가면 더 예쁘다’는 할머니 심정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 왜? 때로는 사명감. 더 많이는 부득이함! 그리고 얼마 전 나는 또다시 청년들과 <길드;다(多)>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앞으로 몇 년 간도 난 싸부, 물주, 매니저를 자처하면서 꼰대와 스승 사이 그 언저리를 어슬렁거릴 것이다. 하루 빨리 퇴출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난 또다시 루쉰을 생각한다. 혹시, 루쉰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루쉰과 청년의 관계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루쉰이 진화론적 세계관을 가졌다거나 루쉰이 청년을 사랑했다거나 루쉰이 약자에 대해 연민을 가졌다는 말만으로 설명되기 힘들다. 난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씩 다 지우고도 남는 것, 그 마지막 마침표 같은 ‘뿐(而已)’이야말로 루쉰과 청년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 말고 루쉰이 살 수 있었던 방법은 없지 않았을까, 라는 조심스러운 짐작. 하여 그것을 탐색해보고 싶은 열망! 요점이 뭐냐고? 나도 내가 뭘 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청년 루쉰의 삶?(그런데 루쉰에게 청춘이 있기는 했었나? ㅋ) 어쩌면 청년에 대한 루쉰의 복잡한 감정? 그것도 아니면 루쉰이 청년들에게 보낸 메시지? 어떤 것도 아니거나 그 모든 것! 그 막막한 길로 기어이 첫 발을 내딛는다. 돌이켜보면 수유너머 시절의 루쉰 독서는 거의 의무처럼 이뤄졌고 고백하건데, 그 때 난 루쉰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문탁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중역본이 아닌 우리나라 루쉰 전공자들의 번역본으로 루쉰을 다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루쉰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 때 비로소 루쉰을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심지어 루쉰에게 이해받는다고 까지 느꼈다. 그 만남은 ‘루쉰 온 더 로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얼마 전 루쉰전집이 완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리나케 그 마지막 출판본들을 주문했는데 이 글을 쓰는 딱 이 순간, 루쉰의 일기와 편지들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운명처럼. ‘루쉰과 청년’이라는 정처 없는 글쓰기를 빙자해서 다시 루쉰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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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⑩ ] 공론화는 끝났다. 우리의 고민은 어디로 가야할까?  글 : 진달래 신고리 원자력 발전 5,6호기의 건설 혹은 건설 중단에 관한 공론화 위원회 시민참여단의 2박3일 종합 토론회가15일에 마무리 되고 이제 20일 공론화 위원회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몇 시간 남지 않았다)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단순히 찬반 투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숙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의 공론화는 새로운 방식의 의사결정 절차이다. 종합 토론회에 참여했던 시민 참여단은 공론화 결과에 상관없이 공론화 과정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토론 과정을 보면 단순히 건설 중단, 혹은 건설 재개에 따른 비용 문제 혹은 전기 요금 상승 등의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앞으로 원전의 안전성 문제, 신재생 에너지의 전력 수요 충당 가능성, 원전 폐기물 안전관리, 지역 주민의 건강관리, 원전수출로 인한 경제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리고 무작위로 선출된 시민참여단은 다양한 연령, 지역의 사람들로 이들이 함께 모여서 토론하는 것 자체가 이번 공론화 과정을 ‘세대를 넘나든 토론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낳게 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토론회에서 "원전을 짓지 않을 경우 결국 석탄발전소나 가스발전소를 지어야 하게 될 것"이라며 원전 토대 위에 신재생에너지 성장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설 재개 측과 "안전을 고려해 원자력 발전을 줄이는 추세"로 신재생에너지가 장기적으로 원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반대 측이 대립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 다 앞으로 신재생에너지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당장 전기 수급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전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갈수록 전기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만약 전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라고 물으면 깜깜한 밤만을 생각하지만 실제는 모든 것이 스톱된다고 보아야 한다. 전기는 좀 더 편리한 삶, 좀 더 쾌적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 삶의 전반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과 같은 가전제품은 마치 의, 식, 주와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과 같이 되었다.  얼마 전 친구가 전기레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써 보니 화기도 나오지 않고, 미세먼지 걱정도 없어서 훨씬 편리하다고 했다. 재미있는 건 집에서 사용하는 가스레인지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못지않게 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전기레인지를 쓰려면 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저 내 주방에서 먼지가 안 생긴다는 차이 밖에 없다. 더욱이 가스레인지는 쓰지 않을 때 끄면 되지만 화력발전소와 같은 대형 발전소는 한 번 가동하게 되면 끄고 켜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렇게 발전된 전기는 계속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발전소는 도시에 있지 않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발전된 전기는 전선을 타고 멀리 도시까지 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고압 송전탑이 만들어내는 삶의 파괴 현장을 목격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당장 공론화가 발표되는 20일 전, 4일간 광화문과 청계과정 그리고 청와대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계시다. 실제 원자력 발전이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은지를 논의하기 전, 우리는 내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나에게 오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2천 년 전 맹자는 정치의 시작을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즉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맹자의 정치는 매우 간단하다. 처자를 돌보는데 부족함이 없고, 돌아가신 조상님이 제사를 받들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나와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건설에 따른 공론화 역시, 맹자가 말한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공론화는 끝났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신고리 원자력 발전 5,6호기의 건설 중단, 혹은 원자력 발전소 폐기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에너지, 즉 전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NM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 ⑨] 이로움(利)이 아닌 의로움(義)은 어떨까? 글 : 봄날 공론화(公論化)는 사회적 맥락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다. 사전적 의미를 따져보아도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는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니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도 되는 일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입 가진 존재들이라면 누구라도 떠들어대는 가운데 그 말들이 수렴되어 그 사회의 정책으로, 또는 실천방향으로 형성되는 것이 공론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론화도 계속해서 함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공론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함께’(公)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함께 한다는 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것(私)’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사사로운 것은 아무래도 개인의 이해관계에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그것이 모여(集) 어떤 큰 흐름을 이룬다 해도 그 흐름을 좆는 것은 그 흐름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함께 할 때뿐이다. 즉, 공적인 것은 사사로운 것의 합(合)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공론화를, 다양한 개인들의 생각을 모으고 반영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끄집어내어 쓰는 어떤 잣대 때문이다. 바로 이해타산적인 태도,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자신 혹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공리주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이로움’에 부합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떤 논리가 만들어 질 때, 다양한 척도, 다양한 측면이 반영되어야 할텐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공리주의에 빠져서 그것이야 말로 유일한 합리적 사고이고 진리이며, 여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다’거나 ‘옳지 않다’고 비난의 소리를 높인다. 나는 신고리 5, 6호기 원전 건설 중단을 둘러싼 공론화도 이 ‘이익’ 프레임 속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원전 건설에 이미 많은 비용이 투입됐으니 지금 중단하면 손해가 아니냐고 말한다. 또 원전이 아닌 다른 전기생산 방식으로는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니 이 또한 손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지 따져보면 답이 나오지 않느냐고 따진다. 그러면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왕 투입된 건설비용은 새발의 피요, 앞으로 더 많은 건설비용이 국민들의 혈세로 들어갈 터이니 손해라고 말한다. 전기요금이 오를 것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계산해서 국민 각자에 그렇게 큰 손해가 가지 않는다고 되받는다. 물론 건설 중단을 주장하는 그룹은 원자력발전의 공포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이 비록 비용 면이나 발전능력 면에서 합리적이지 않더라도(이미 대체 에너지 생산기술은 원전기술에 맞먹거나 뛰어난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인간사회, 나아가 지구를 위해 원전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롭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익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한, 원전 건설을 밀어붙여야 한다, 중단해야 한다는 양쪽의 주장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 이미 3천 년 전에 맹자는 이로움(利)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세상을 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신의 나라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데 이로운 방법을 묻는 왕에게 “왕께서는 왜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인의가 사람의 마음에 고유한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공(公)적인 것이며, 이익을 따지는 마음은 나와 남이 서로 나타나면서 생겼으니 사사로운 것이다. 그러니 천리를 따르면 이롭지 않으려 해도 이롭게 될 것이니 먼저 이로움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두 강대국의 싸움을 말리려는 선비에게 맹자가 어떻게 싸움을 말릴 것인지 물었다. 선비가 그 싸움이 장차 이롭지 않음을 말하려 한다고 하자, 맹자는 ‘이로움’으로 설득하지 말라고 한다. 현자의 눈에는 이로움이 있으면 이롭지 않음이 있고, 죽을 때까지 이로움만을 누릴 수 없으며, 결국 이롭지 않음의 파괴적 결말을 맞게 되는 인간사회의 미래상이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맹자의 왕도정치, 인의의 정치가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바로 오랫동안 젖어있던 공리 프레임을 걷어낼 때 참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프레임이 있을까? 나는 파지사유를 만들어낼 때 우리가 공론화 과정을 거쳤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충분히 논의했고, 개인의 생각들이 충돌하고, 설득하고 설득당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것, 더구나 이로움 같은 것은 자리잡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좆아서 공론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로움이 아니라, 이런 의로움. 이 사회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마땅히 해야 할 일, 의로운 일은 무엇인지, 원자력 발전이 이로운가 이롭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것이 의로운가 의롭지 않은가를 따져 물어보면 우리는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