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55호) 하필왈리(何必曰利) - 무력과 무기력 사이

2017.03.06 23:24

자누리 조회 수:334

[특집] 후쿠시마 '고전'으로 보다

하필왈리(何必曰利) - 무력과 무기력 사이






글:자누리









3.11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되새기는 나비행진을 앞두고 문탁에서는 게릴라 세미나를 진행했다. 마침 <맹자> 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던 터라,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을 읽으며 그 바람이 멀리 맹자의 전국시대까지 부는 것 같았다. 나비효과인가? ‘맹자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왕도정치는 왕의 통치술로 읽기도 하고 후에 중국 제국의 관학이 된 관계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독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텍스트 <맹자>는 무엇보다 당시의 사회상을 고발하는 르뽀이며 반전사상이었다. 그래서 후쿠시마의 바람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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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대 1

맹자가 살던 시대는 전국시대라 불린다. 이름답게 오랜 전쟁으로 민중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맹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생생하게 전한다. “왕의 찬방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왕의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완연하고 들에는 굶주려 죽은 시체들이 있다. 이는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한 것이다.”

사람은 굶는데도 왕이 먹을 가축들은 통통하다! 결국은 가축들에게 사람을 먹게 한 것과 진배없다는 대목에서 맹자의 분노가 느껴진다. 민중이 굶주린 것은 전쟁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서이다. 어느 정도로 전쟁을 했냐면 앞선 춘추시대만 해도 120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있었는데 이 때가 되면 열 몇 개의 제후국만 남아 있었다. 합병전쟁이 계속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군대에 동원되거나 삶의 터전을 잃고 거리를 떠돌았다. 맹자는 오죽하면 그 중요한 예의도 먹고 살아야 가능한 것 아니냐고 강조한다. 농촌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생계를 위협당하는 것,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알바할 곳도 없지 않겠는가. 배제된 자들, 호모사케르는 2500여 년 전에 이미 그 곳에 있었다. 그러니 전국시대 노자, 묵자, 장자 등 많은 사상가들의 기저에는 반전사상이 흐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맹자의 명언 하필왈리(何必曰利)’도 반전사상의 표현으로 보인다.

신흥 강국 중의 하나였던 위나라의 양혜왕은 맹자를 만나자마자 자기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 때 맹자는 왜 하필 이익을 말하냐고 단호하게 비판한다. 모두가 이익을 앞세우면 도대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익은 부국강병을 말한다. 실제로 모두가 이익을 추구하면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전쟁에는 부모 자식, 형제 사이에 죽이는 일도 상당수 포함된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익을 좇을수록 이로울 수 없는 역설이 생긴다고 왕을 설득한다. 그러니 전쟁을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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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대 2

우리는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는 또 한 시대를 알고 있다. 이익을 뜻하는 ‘interest’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단어라고 한다. 맹자의 말처럼 이익을 앞세우는 이 시대도 전쟁의 시대나 다름없다. 이라크전과 같은 직접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화폐가 벌이는 포성 없는 전쟁에 익숙해진 채 살고 있다. 전쟁은 경쟁의 형태로 일상으로 내부화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자체가 재난이지만, 미국의 9.11 이후에 재난자본주의라는 개념이 특별히 사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적 관계를 해체하는 것으로 전쟁을 수행중이다. 우리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대신에 일상의 재난은 점점 다양해지고 대규모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확실히 후쿠시마는 이 시대의 문제란 그게 무엇이든 전지구적 사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후쿠시마 사태 직후 애초에 일본이 왜 원전을 받아들였는지 의아해졌었다. 일본은 히로시마를 잊었던 것일까?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을 보니 충분히 토론하고 검토하지 못했던 저 간의 사정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 결과 일본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과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을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애썼다. 원폭은 전쟁을 위한 것이지만 원전은 평화로운 생활을 위한 것이라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담론이다. 그것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거나 아니면 애써 모르려고 한다. 이데올로기는 이런 순간에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하게 지배계급이 조작하고 우리는 피해자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은 3.11을 겪은 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원전이 수행하는 전쟁은 원자폭탄만큼 위력적이다. 그래서 이케가미 요시히코는 말한다. “원자폭탄하면 절멸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죽어간다. 이게 원전과 원폭을 함께 꿰뚫는 본질이다.” 다시 말하면 원폭이든 원전이든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하필왈리! 이것이 원전과 원폭을 함께 꿰뚫는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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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유토피아

사실 전쟁은 무력을 사용하는 모든 일의 은유이다. 그 맞은편에는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꾸리는 자치력이 있다. 재난자본주의는 위기와 재난을 이익으로 전환시킨다. 그렇다고 자본이 재난 그 자체에서 이윤을 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난이 불러오는 민중들의 마비를 이용해 욕망을 단일화시킨다. 대책 없는 공포감의 확산은 국가주의의 강화를 부른다. 이를테면 원전을 더 안전하게 관리하는 체제를 만들자고 할 수 있다. 또는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를 급속하고 대대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국가가 나서면 공포감의 저 끝에 섣부른 희망을 내비친다. 이 또한 희망을 국가가 독점하고 주도하는 무력이다. 그러나 원전을 비롯한 전쟁의 시대는 묵시록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죽음의 그림자만 보며 무기력하게 있을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맹자의 단호함을 배워야 하나보다.

<맹자>에는 왕더러 무엇이 됐든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많이 나온다. 꼭 해야 할 것은 인정(仁政)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핵심은 철에 맞추어 농사짓게 놔두면 된다는 것이다. 대신 세금 많이 물리지 말고, 공유지를 빼앗지 말며, 농사지을 땅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알아서 먹고 살며 혹시 흉년이 들어도 아무도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현시대적으로 독해하자면, 왕이 무기력할수록, 즉 국가적인 것 또는 무력이 약할수록,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스릴 힘이 있고 그 힘이 발휘된다. 무기력은 국가의 것이어야지 민중들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맹자의 이 사상, 너도 나도 부국강병을 말하는 시대에 너무 한가한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래서 맹자는 당대에도 너무 유토피아적이라고 평가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유토피아적이면 어떤가. 판타지의 세상에서 유토피아가 사라진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맹자가 허무맹랑하다는 반응 속에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은 것은 그 유토피아가 근본에 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필왈리는 힘이 세다.

원전의 문제는 원폭과 다르지 않다는 성찰을 후쿠시마 사태라는 아픔을 겪고서야 정식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그렇게 근본을 성찰하게 하는 또 하나의 아픔인 4.16도 다가오고 있다. 문탁인들은 이미 추모를 시작했을 것이다. 누구는 시를 읽어주고 누구는 백팔 배를 하며 누구는 금주와 단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세월호로 불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 명 한 명의약전을 읽는다. 이 성찰은 우리 식의 정치이다. 맹자는 하필왈리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이오!”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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