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뉴미디어는 이전의 웹진보다  우리의 공부를 좀 더 충실히 표현해 내고자 합니다. 2017년 봄 그리스를 다녀온 

다섯명의 친구들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진과 함께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로 보여드립니다. 



[조르바 여행단, 그리스에 가다] ③

그리스, 문명의 폐허를 지나가다






글 : 새털

 













1. 맥주와 올리브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나의 그리스여행은 미토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알파와 친숙해졌고 더러 픽스를 접하기도 했지만, 베스트는 스파르타였다. 이렇게 그리스 맥주들과 함께 나의 그리스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안내서에서 소개하는 그리스 대표술은 우조와 락키다. 인천공항을 떠나기 전부터 우조와 락키를 맛볼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미토스와의 만남은 기습적이었다.

아테네여행 첫날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러 간 수블라키식당에서 미토스를 발견했을 때, 나는 내가 한국을 벗어나 그리스에 도착해 있음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 맥주이름이 미토스라니!’ 미토스(mythos)는 신화와 이야기를 이르는 그리스말이다. 미토스의 맛은 좀 싱거웠다. 그리스 사람들의 대중적 입맛을 사로잡은 맥주는 알파다. 독일맥주 하이네켄과 디자인과 맛이 비슷한 알파는 시원하고 깔끔했다. 픽스는 크레타에서 마셨는데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탁월한 맛은 아니었다고 본다. ‘나의 베스트스파르타는 밀맥주와 흑맥주의 풍미가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감칠맛이 났는데, 스파르타 근방에서만 판매되어 딱 한 번밖에 마시지 못했다. 많이 아쉽다. 그리고 하이네켄처럼 세계적인 네덜란드맥주 암스텔이 알파와 함께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맥주다. 나는 휴대폰 사진폴더에 맥주리스트를 쌓아가는 재미가 있으리라고는 여행을 준비하는 6개월 동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누가 그리스여행을 준비하며 맥주 마실 계획을 짜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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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의 15, 나는 맥주뿐 아니라 많은 것들과 기습적인 만남을 가졌다. 햇수로 4,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고 떠난 여행에서 놀라웠던 건 그간 읽었던 책에서는 행간으로도 읽을 수 없는 것들과의 대면이었다. 이를테면 올리브가 그렇다. 아테네도시의 주신이 되기 위해 아테네여신이 포세이돈신과 경쟁하며 올리브나무를 선물로 주었다는 신화는 알고 있었지만,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나무숲은 상상 이상이었다. 신화가 아니라면 올리브오일이거나 병조림 올리브가 올리브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였던 나에게 이제 막 꽃이 피어나는 올리브나무를 본다는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우리는 자주 영화의 제목처럼 빽빽이 들어찬 올리브나무 사이로 곡예운전을 하며 지나갔다. 그간 읽었던 책 어디에도 내가 구글맵이 찍어주는 올리브나무 사이 길을 지나가게 되리라고는 알려주지 않았다. “모든 곳에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탈레스의 말은 모든 곳에 올리브로 가득 차 있다로 바꿔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씩 꼬박 4년을 갈고닦은 공부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순간, 나는 완벽한 여행자로 리셋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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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펠로폰네소스에서 궤도를 변경하다



펠로폰네소스에서 우리의 일정은 아테네에서 출발해 코린토스-에피다우로스-나프폴리오(1)-아르고스-스파르타(1)-올림피아(1)-델피(1)-테베-아테네공항(크레타로 출발)’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자동차로 달려 아테네에서 1~2시간 거리에 있는 코린토스, 아르고스, 델피, 테베와 거기서 1~2시간쯤 더 달려야 도착하는 스파르타와 올림피아는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며 자주 등장하는 지명들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그곳들은 까만 점으로만 보일 뿐, 그 위치와 거리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 점들 사이의 짧은 거리물리적 거리감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델피신전에서 저주받은 신탁을 전해들은 오이디푸스는 아르고스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테베로 달아났을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협곡이나 산맥이 이들의 불화를 조장했던 것인가?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없애고 아테네로 귀향하던 테세우스는 왜 낙소스섬에서 잠이 들었을까? 크레타에서 낙소스 그리고 아테네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 펠로폰네소스 일주를 앞두고 내 머릿속엔 전설적인 인물과 역사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첫 번째 날, 숙소의 주인아저씨는 우리에게 미스트라스행을 강력 추천했다. “당신들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미스트라스는 그리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곳이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그곳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우연히 일정에 추가된 미스트라스는 보석 같은 명소였다. 여기서 우리는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를 문장으로 가진 비잔틴제국과 만나게 되었다.

그랬다. 그리스에는 내가 공부한 신화와 전설 속 고대 그리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그리스와 국가부도의 위기상황에 있는 현재의 그리스가 겹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그리스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 정교회 신도들이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올림포스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절 달걀을 나누어 먹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고,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적대가 아니라 그리스와 터키의 적대감정이 보다 생생했다. 수학여행을 떠나온 나에겐 궤도를 이탈한 황당한 느낌도 들었지만, 미토스와 알파맥주를 번갈아 마시며 지금 보고있는 그리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3. 폐허의 고요함과 평온함, 미스트라스와 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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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라스는 해발 600미터의 산중에 세워진 요새도시이다. 산의 상층부에는 성곽과 궁전이 하층부에는 교회와 수도원과 관공서가 그리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전성기에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보다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번성했고, 이 절정의 시기에 모레아의 경이라는 뜻으로 미스트라스의 이름이 지어졌다. 도도한 성채도시는 1463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침략에 백기를 들고 만다. 미스트라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몰락 이후 3년을 더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대항한 최후의 항전도시이다. 이후 그리스와 터키는 오랜 정복과 독립전쟁을 거쳤고, 그리스사람들의 터키에 대한 적대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숙소의 주인아저씨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왜 꼭 미스트라스에 가봐야 한다고 고집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레아의 경이미스트라스는 지금 비잔틴의 폐허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미스트라스는 산중에 위치한 성채도시라 다른 도시들과 달리 세월의 변화로부터는 비껴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번영기의 우아한 풍채는 이제 흔적처럼 남겨진 잔해를 통해 짐작해야 하지만, 사람의 발길로부터 멀어진 비잔틴의 폐허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잔틴시대의 아름다음을 자연의 방부처리를 거쳐 보존하고 있다. 미스트라스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세 도시와 교회의 양식을 잘 기록하고 있는 화석과 같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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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스트라스를 찾았을 때는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막 그칠 즈음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는 선선했고, 빗물에 씻긴 시야는 선명했다. 먼 이국의 유적지에 도착하면, 의식적으로 표지판을 찾고 어떤 정보든 읽어내려 하는 여행자들의 습관을 미스트라스는 무력화시켜버렸다. ......여기서 무얼 더 알아야 할까? 우리 눈에 보이는 폐허와 그 폐허가 주는 공허함을 그냥 느끼면 될 일이다. 웃자란 거목들과 잡초가 우거진 성채와 교회는 이 도시가 겪어낸 세월의 풍상과 더불어 고요함과 평온함을 동시에 전달해준다. 미스트라스에서 나는 거대한 허무가 가져다주는 경건함이라는 역설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미스트라스에는 성 소피아 교회와 성 데메트리오스 교회가 있다. 이곳에서는 중세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칠이 벗겨진 프레스코화는 예수의 사랑과 사도들의 이야기 등 성경의 내용을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와 성인들의 머리에 동그랗게 그려진 아우라와 평면적이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표정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너무 단순하게 표현되어, 너무 직접적인 그 표정들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프레스코화 어디에선가 나와 같은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좌절하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도시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시간의 압도적인 힘 아래 인간은 여전히 원하고, 원망하고, 노력하고, 좌절하는 희노애락애오욕의 인생을 살아간다. 이건 그저 부질없는 미련함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철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함을 알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애쓰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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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중 유일하게 스파르타 맥주를 맛본 곳도 미스트라스의 식당이었다. 스파르타는 미스트라스와 1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스파르타 맥주병에는 스파르타의 전사가 귀엽게 그려져 있다. 용맹한 전사라기보다 현역에서 물러난 예비역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 귀여운 전사맥주를 스파르타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연고지를 벗어나서는 판매되지 않는 스파르타 맥주가 쇠락한 스파르타의 입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우리가 찾아간 스파르타의 유적지는 아테네와 같이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원형극장, 경기장 등 고대 폴리스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었지만, 유적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잡초더미에 방치되어 있었다. 스파르타 시내에 위치한 박물관 또한 규모가 작고 전시물이 거의 없었다. 펠로폰네소스의 전통강호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승리하며 신흥강국 아테네의 무릎을 꿇렸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스파르타에도 아테네에도 영광은 없다. 그들의 영광은 내가 읽은 기원전 5세기의 책들 속에만 있다고 생각하니 쓸쓸함이 느껴졌다. 스파르타 맥주를 더 이상 마시지 못한 나의 아쉬움에는 이런 사연도 있었다고 사족을 달아본다.

 


 

4. 그리스에 김치찌개 식당을 열어볼까



현재 그리스는 국가부도의 위기상태에 있다. 가는 곳마다 비어진 상가가 많고, 관광수입으로 그리스 경제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한때는 세계 최고의 선박기술을 자랑했으나 이제는 관광객들이 쓰고 가는 돈으로 유지되는 그리스의 살림살이는 팍팍해 보인다. 지금의 그리스는 문명의 영광보다는 퇴락을 좀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퇴락하는 것들에서 어떤 편안함을 느꼈다. 그건 왜일까?

우리가 델피에서 갔던 식료품점 할아버지는 집에서 직접 양봉한 꿀이라며 진열된 상품의 품질을 자랑하셨다. 짧은 영어로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가 뻔하지만, 바디랭귀지로 표현되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진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올림피아에서 우리가 머문 그리스농가에서는 전형적인 그리스 아저씨와 아줌마를 만날 수 있었다. 난방이 잘 되지 않아 잘 때는 썰렁했고, 방음이 안 돼 속닥거리는 소리에도 시끄럽다는 잔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낡았고 사용하기에 편리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짐을 싸서 출발하려는 우리에게 집주인 부부는 집에서 짠 올리브오일을 한 병 주셨다. 우리는 부부의 마음이 고마워 되도록 버리지 않고 다 먹으려고 가는 곳마다 기름병을 싸들고 다녔다. 미스트라스를 추천한 나프폴리오의 숙소아저씨는 막 도착해서 피곤한 우리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이나 그리스여행에 대한 정보를 전해준 열혈 오지라퍼였다. 산토리니에서 탄 버스에서는 차장이 차비를 받았다. 대부분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인데 탄 곳과 내려야 할 곳을 전혀 헷갈려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신전이나 선셋이 아니라 이런 일상적인 삶이었다. ‘국가부도라는 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공기처럼 느껴졌지만, 위기가 대수라는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일상을 알뜰살뜰 꾸려가고 있었다. 경제성장이라는 거품이 터져버리면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욕망의 크기도 줄어들지 않을까? 내 눈에는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이 단순하고 소박해 보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믿을 수 없는 여행자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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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고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는데, 나는 여행중 문득문득 발견되는 내 모습과 감정에 조금 놀랐다. 미스트라스와 스파르타의 폐허에서 나는 가정경제가 허물진 를 보았고, 그걸 마주한다는 게 민망하고 쓰렸다. 코린토스 유적지 박물관 뜰에는 머리만 달아난 조각상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신체의 일부가 사라져도 조각상은 자기 시대의 유전자를 간직하고 꼿꼿하게 서있다. 훼손된 채, 망실된 채, 보장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그리스에서 본 것은 유한한 존재의 취약함과 일상생활의 견고함이다. 내가 그리스에서 본 것은 서양문명의 기원이라는 빛나는 영광이 아니라 그것이 허물어진 자리에서 일상생활을 여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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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바닷가마을인 코린토스를 지날 때는 여기에 와서 한 달쯤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어 놓은 가게보다 비워진 가게가 많은 스파르타를 지날 때는 여기에 김치찌개 식당을 하나 차리면 어떨까 라고 생각이 조금 자랐다. 김치찌개, 파전, 소주로 메뉴를 한정해서 팔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공부를 한다는 마스터플랜을 세워보았다. 관광지인 크레타와 산토리니는 아무래도 물가가 비쌌고, 관광객이 많은 만큼 도로를 가득 메운 매연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살기엔 임대료가 싸고 인적이 드문 스파르타가 최적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임대료로 싼 김에 식당이 아니라 민박과 식당을 겸해보면 어떨까? 그리스 고전 기숙프로그램을 돌려보면 어떨까? ...그러려면 렌트카도 하나 있어야겠다는 데까지 망상은 새끼를 치며 커져 갔다.

그리스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이민과 새로운 사업구상을 하고 있는가? 아니다. 하루살이 인생을 바쁘게 살고 있다. 운전 중 길이 막힐 때마다 여기가 올리브나무로 가득 찬 펠로폰네소스평원이라고 주문을 걸며 잠시 짜증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운이 좋다면 스파르타에 한국식당을 차릴 절호의 찬스가 주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런 운이 돌아오지 않아도 한번쯤 그리스의 공기를 쐬고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다음엔 터키에 가볼까? 트로이전쟁이 일어났던 터키에서 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아닌 무엇과 만나게 될까? 또 다시 고개를 쑥 빼고 내게 올 행운(?)과 필연(!)을 기다린다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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