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➀]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요~ 히말라야  신고리원전 5,6호기 공론화를 해보자고 녹색다방과 추장단이 함께 모인 첫 회의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각자 관계 맺고 있는 외부 모임을 찾아가 이 사안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내려면, 설명 자료나 영상이 필요하니 그걸 나한테 만들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녹색다방에서 오래 많은 활동을 해 왔기에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내가 그 일을 해주기 바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의문들이 일어났다. 이미 많은 활동을 해 왔는데, 이번에도 또 내가? 공론화라는 것은 단순 지식전달이나, 그동안 해왔던 캠페인과는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내 의문의 배경에는 요즘 읽었던 스피노자가 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를 탐구하는 참된 방법은 관념의 획득 후에 진리의 표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자체를 적당한 질서를 가지고 추구하는 바로 그 길이다.”    진리탐구란 하나의 명확한 관념으로부터 다음의 명확한 관념이 따라 나오도록 적합한 사유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자체다. 그것이 ‘인식’이며 ‘지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처음부터 그에 관해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알기위해 처음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이야기다. 어떻게 모르는 것으로부터 아는 것이 따라 나올 수 있겠는가.  돌아보면 나는 순전히 좀 더 좋은 아이들 먹거리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살피면서 원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관심은 필연적으로 밀양의 목소리를 전하는 친구들과의 접촉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또 밀양은 이전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방사능과 원전과 연결되었고 어느 순간 동네에서 탈핵릴레이를 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렇지만 내가 원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그저 언론과 몇 권의 책에서 본 것이 전부다. <핵마피아> 영화 속 정범진 핵공학 교수에 의하면 나는 “핵공학적 지식도 없는 채 그저 소문으로 귀신을 믿는 것처럼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는” 우매한 민중이다. 그는 나 같은 이들이 국가중요사안인 원전 건설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지식수준이 그와 같지 않다고 해서, 원전에 대해 내가 뭔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인식 혹은 지성이라는 것은 사물에 대해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싸고 무수한 말들과 생각들이 오고간다. 이런 혼란이 있을 경우에 스피노자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유들을 가장 단순하게 나누어 보라고, 그러면 혼란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게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생각은 절대로 허위일 수 없으니 거기서부터 탐구의 과정을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정범진 교수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진 않지만, 내 행동의 원칙이 되며 세상에서 떠도는 말과 생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몇 가지만큼은 아주 확실히 알고 있다.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을 아이들이/사람들이 먹는 것이 좋은가?/옳은가?’ ‘누군가 편리한 전기를 얻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짓밟는 것이 좋은가?/옳은가?’  이런 명제들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도, 밀양의 할머니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된 속성에 비추어 본 것이며 그래서 나 자신에게 거짓일 수 없는 진실한 것이기에 단단하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리탐구의 시작 지점에 놓인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관념은 어쩌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녀야 하는 윤리적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친구들 역시 나처럼 공론화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을 뿐일 텐데, 회의자리에서 신경질을 낸 것이 참으로 머쓱하다. (다음날 나는 누군가에게 그날 내가 생리통이 심했었다고 변명 했다.) 그 뒤 내가 청송으로 또 휴가지로 돌아다니다 온 사이, 그 영상의 제작은 결국 나보다 인품과 기술력이 높은 청량리샘이 만들어 주기로 했다고 한다.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렇지만 영상이 없더라도,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나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제부터는 신고리원전 5,6호기에 대하여 혹은 원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하여 모두 다 한마디씩 해야만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 한마디의 발화가 그 다음으로 이어질 무수한 관념과 행위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내는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에.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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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마을 공동체가 왜 파괴되었는지, 12년이나 투쟁해 온 주체들이 지금도 마을에서 소수로 고립되어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하며 찬성파 주민들의 전횡과 돈잔치를 속절없이 지켜보며 분개하며 가슴 앓이 해야 하는지. 밀양 송전선로가 과연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 이미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올여름, 이 폭염에도 전체 전력설비의 1/3이 놀았다. 이 엄청난 전력예비율, 신고리 5,6호기가 없어도 전력수급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데, 고리 1호기가 빠져도 신고라 3~4호기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신고리 5~6호기까지 왜 저렇게 어마어마한 핵발전단지를 만들어야 했을까." - 밀양*문탁 포럼 이계삼샘 글 중에서

밀양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처음에 밀양은 우리에게 놀라움이었고 미안함이었다. 매일 매일 산꼭대기의 농성장까지 기어올라가 송전탑공사를 온 몸으로 막아내는 할머니들의 투쟁에 놀랐고, 이치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2012년까지 ‘밀양의 전쟁’을 새까맣게 몰랐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그렇게 찾아가고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6년이 지났다. 이제 밀양은 우리에게 외갓집이고, 친정이고, 본가이다. 우리는 밀양의 연대자로 시작했지만 이제 우리는 밀양의 식구가 되었다. 밀양은 우리에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부끄러움이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전기가 그분들의 피눈물을 타고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펑펑 쓰는 에너지가 핵발전소라는 전대미문의 정치괴물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되었다. 밀양을 통해 보게 된 나의 민낯, 우리 삶의 민낯. 우리는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밀양은 이제 경상남도에 있는 어느 지역의 이름이 아니다. 밀양은 탈송전탑 투쟁의 장소만이 아니다. 이제 밀양은 탈성장의 다른 이름이고, 고르게 가난한 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밀양은 우리가 가고 싶고 찾고 싶은 새로운 삶의 비전이다. 하여 우리가 밀양을 도운 게 아니라 밀양이 우리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밀양이다. NM

밀양에서 삶정치를 묻다 글 : 김혜영(문탁네트워크 회원) 문탁네트워크는 밀양을 만난 뒤, 기꺼이 밀양의 친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우리는 밀양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발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에게 밀양은 탈핵 탈송전탑 싸움의 사회적 상징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밀양을 지원한다고 생각했던 연대활동은 밀양을 돕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를 살리고 역량을 키우는 활동이 되었다. 밀양을 통해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 탈핵은 윤리적 삶을 성찰하는 공부가 되었다. 지난 5년, 밀양은 문탁의 공부와 활동에 언제나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밀양과의 이야기는 문탁의 역사가 되었다. 2017년 여름 ‘밀양 인문학 캠프’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밀양을 만나다 2012년 여름, ‘민주주의’와 ‘정치’를 화두로 그 해 문탁의 공부를 갈무리하기 위해 개설한 강좌에서 우리는 밀양싸움에 대해 들었다.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투쟁의 주체라는 것도, 765kv송전탑 반대라는 이슈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멀고 먼 뉴욕에서 벌어진 오큐파이 운동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읽으면서 밀양의 싸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내심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직접 만나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로 농활대를 꾸렸다. 밀양과의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이 시작되었다. 송전탑반대 이전에 탈핵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2011년 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뒤 우리는 문탁의 방식에 걸맞게^^ 공부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녹색평론에서 나온 <원자력신화로부터의 해방>을 같이 읽었고, 탈핵활동가의 특강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은 몇 사람은 주머니를 털어 ‘원자력? 나는 반대' 배지를 만들어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탈핵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질문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고 삶을 바꾸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 밀양에서 어르신들을 만나고 나서 우리의 몸이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알게 되면 몸과 마음이 같이 바뀔 수밖에 없다. 탈핵이 삶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밀양의 투쟁, 문탁의 공부 밀양의 송전탑 반대싸움은 오묘하고 놀라웠다. 농사일과 싸움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운동의 스타일. 송전탑건설예정지를 점거하여 싸우면서도 움막 앞 공터에 씨앗을 뿌리고 싹을 돌보며 꽃을 피우는 농성. 공사를 위해 올라오는 용역들을 막기 위해 옷을 벗고 쇠사슬을 목에 감지만, 또 날이 밝으면 된장국을 끓이고 김치 부침개를 부치고 밥을 지어 서로에게 먹이는 일상이 이어지는 싸움. 눈앞의 보상금이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걱정되어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어르신들. 마을 공동체가 깨져서 자신들은 고립되어 가면서도 아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너른 품이 된 밀양. 소수 활동가와 환경단체가 겨우 명맥을 이어왔던 탈핵운동의 불씨를 널리 퍼뜨린 운동. 밀양의 싸움은 일터와 삶터, 정치와 일상, 당사자와 연대자, 광장과 마을의 분리를 당연하게 생각해 온 상투적인 생각과 실천을 조용히 흔들었다. 이 운동은 전염성이 높았다. 문탁 역시 밀양이 퍼뜨리는 연대와 기쁨의 증식운동에 피할 수 없이 감염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두 팔 벌려 환영한 감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밀양이 우리를 감동시킨 것들은 모두 기존의 정치투쟁이나 조직활동의 문법과는 다른 것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공부를 통해 새롭게 깨우쳐가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밀양 할매 할배들이 농촌 노인들이라는 세상의 속견에 하이킥을 날리며 민주주의와 자기 삶의 새로운 주체가 되었듯이 우리도 공부를 통해 주부, 직장인 등의 정체성을 깨고 다른 삶을 발명할 수 있기를 원했다. 우리는 공부 역시 연대와 기쁨의 증식 운동이고 어르신들이 겪어내고 있는 싸움만큼 치열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탁의 공부가 세상의 습속과 가치를 뒤흔드는 급진적인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밀양들이, 서로 다른 문탁들이 접속하고 뒤섞이며 증식되기를 꿈꾸었다. 문탁의 밀양 시즌2 2014년 행정대집행 이후 문탁의 밀양 연대활동은 독자적인 녹색‧탈핵활동으로 전환되었다. 문탁에서도 밀양 시즌2가 시작된 셈이다. 시즌1이 밀양과의 연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시즌2는 탈핵과 녹색에 대한 공부와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먼저 행정대집행 이후 한전 앞 항의시위를 동네로 가져와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76.5일간 탈핵 탈송전탑 릴레이 1인 시위를 했다. 1인 시위 형식의 릴레이는 2015년 4월에 다시 시작되어 지금까지 2년 4개월(원안위 앞 65주, 동네릴레이 53주)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탈핵과 관련된 책을 읽고 북 콘서트와 세미나를 하고 특강을 여는 한편 틈틈이 탈핵영화상영회도 개최했다. 밀양과의 만남은 인문학 공부의 형식과 내용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강독에서 읽은 <논어>의 한 구절은 피켓의 단골 구호로 변형되었고, 북 콘서트에서 함께 읽은 <밀양을 살다>는 연극대본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한국탈핵>은 유인물의 내용이 되었다. 탈탈탈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과 밀양으로, 부안으로, 홍성으로 다니며 길 위에서 공부를 했다. 5년 동안 열 번 넘게 농활을 다니는 동안 문탁에서 만나기 힘든 존재였던 청년들이 문탁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동화전 마을과의 인연이 깊어지고, 밀양 대책위를 통해, 전송넷을 통해, 녹색당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처럼 새로운 공부와 관계가 생겼고 그 관계는 문탁의 움직임에 적지 않은 활력을 불어 넣었다. 탈핵이 수행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 그 사이에 문탁에서 탈핵은 언제나 주요한 이슈였고 논란거리였다. 1년의 공부와 활동을 갈무리 하는 문탁 인문학 축제 첫날의 주요 프로그램이 3년간 연이어 탈핵시위나 집회였던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2014년은 축제 첫날 미금역에서 수 십 명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76.5일 시위를 마무리했고, 2015년은 꽹과리를 울리며 방독면 탈을 쓰고 커다란 평화의 새를 날리며 탈핵퍼레이드를 했고, 2016년은 이명박과 박근혜 가면을 쓰고 탈핵집회를 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밀양과 탈핵의 의미를 묻는 퍼포먼스였다. 과연 수도권에서 도시적 삶을 사는 문탁 학인들에게 탈핵이 삶을 바꾸는 수행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라는 물음말이다. 문탁에서는 우리가 벌이는 일들이 모두 공부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릴레이 시위를 하고 농활을 하며 후기를 쓰고 느낌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문탁의 안팎에서 앎과 실천의 연쇄를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온 것일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탈핵활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동안 어떤 사람들은 문탁의 공부나 활동이 공동체 안에서 자족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문제는 자족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문제는 끊임없이 활동을 벌이고, 나름의 실천을 만들어 왔지만 우리 자신의 ‘공부하는 삶의 양식’을 잘 만들어 오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우리는 말로는 자기 삶의 발명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몸은 여전히 밀양 연대자, 세월호 연대자, 인문학의 소비자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뭔가 찝찝했던 우리는 지난 3년간 인문학 축제에서 탈핵이 뭐냐고 물으며 이 문제와 거듭 대결하려 했는지 모른다.(올해부터 인문학 축제에서는 주제와 대토론회를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를 보니 결국 밀양에서 축제의 프롤로그와 대토론회를 미리 앞당겨 하고 있는 것 같다.^^) 삶정치란 무엇인가 밀양과의 만남에서 시작해서 공부와 활동을 둘러싼 문탁 내부의 고민까지 멀리 돌아왔다. 포럼의 발표 주제인 ‘삶정치’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삶권력은 다중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고 통치성의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자본과 국가 장치 속으로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삶정치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고 새로운 대안적 주체를 낳는 삶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정치는 사람들을 나누고 분류하는 기존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그 분류 자체를 문제 삼는 자율적 주체를 만드는 실천이다. 삶도 정치도 함께 하는 것이기에 삶정치란 곧 대중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가치화하는 것이다. 나는 밀양어르신들을 삶정치의 주체로 이해한다. 밀양의 송전탑 반대 싸움은 탈핵운동 이상의 하나의 삶정치적 사건이었다. 문탁이 밀양에 감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도 그랬다. 그러나 삶은 가치화를 둘러싼 투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를 끌어 내리려는 중력과 맞서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매번 공부와 활동을 통해 배우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러면서도 각자 자신만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구성해가는 그런 신체가 되고 있는가. 삶정치적 사건이란 바로 그런 신체로의 변화이다. 바로 이런 삶의 변형 속에만 삶정치가 있다. 밀양인문학캠프는 이런 질문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문탁 안에서 시작하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신고리 5,6호기 반대라는 당연한 대답을 문탁 학인들에게 들으려고 공론화를 시작할 리가 있겠는가. 이 과정에서 각자의 질문을 던지고 서로의 공부가 연결되는 삶정치적 사건을 구성하자는 것이다. 정치에 대해서도 공부에 대해서도 심지어 탈핵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밀양인문학캠프에 와 있다. 문탁이 제안하고 밀양이 화답하여 공들여 만들어진 이 자리가 우리에게 작지만 그러나 소중한 변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문탁의 밀양 시즌3에 대한 논의가 활기차게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NM “운동은 먼 미래에 쟁취될 승리를 약속한다. 반면, 사소한 순간들에 이루어지는 소박한 행동은 그때그때의 성취를 약속한다. 삶을 고무하면서, 때로는 삶의 비극적인 면을 들추면서, 자유를 향한 경험이 구체적으로 행동화하는 때가 바로 그 순간들이다. 그런 순간들은 인간의 통상적 이해를 뛰어넘어 초월적이고,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 순간들은 저 광대한 우주의 별들만큼이나 아주 다양하다.”(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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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⑦ ] 최선의 선택        글 : 뚜버기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을 둘러싼 공론화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지난 달 모처럼 녹색다방의 탈핵릴레이에 동참했다. 그날 준비한 퍼포먼스는 행인들에게 <건설 중단>에 대한 찬반의견을 묻는 ‘스티커 붙이기’였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공론화가 뭔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고, 또 공론화를 아는 사람들도 상당수는 중단해선 안 된다고 반대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런 분위기를 접하니 사태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도 그때까지 공론화과정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일종의 공청회와 여론조사를 결합한 형태 정도로 시민참여단을 이해하고 있었다. 좀 더 조사해보니 시민참여형 공론조사라는 것의 키포인트는 “학습과 토론”이었다. 공론화에 참여한 시민이 처음에 가졌던 막연한 찬반의견이, 충분한 정보를 학습하고 토론을 거쳐서 보다 합리적인 의견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 최초의 통계조사 결과와 극적인 전환도 가능하다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경우,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효과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실제로 1996년에 새로운 발전소 건설을 둘러싸고 미국 텍사스주에서 8차에 걸친 공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예상과 달리 친환경에너지 정책을 위해 기꺼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의 수가 52%에서 84%로 급증한 사례가 있다(녹색평론156호, <공론조사에 대한 이해와 오해>). 공론화를 통해 우리는 최선의 판단을 하게 될까? 놀랍게도 이 방식은 스피노자가 <<정치학논고>>에서 언급한 내용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대중에겐 진리도 없고 판단능력도 없다는 주장이 완전히 그릇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데 그 이유가 “국가의 주요정무는 대중들 배후에서 비밀리에 처리되며, 그들에게는 감춰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사안을 토대로 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추측할 수 밖에”(<정치학논고>,7장27절)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관련된 정보와 사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대중들도 누구나 가장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숙고하고 협의해서 결정하는 방식은 민주주의에 맞닿아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민주주의야 말로 가장 자연적이고 자유에 부합하는 정치체이며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서로 협력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시민참여단은 숙의 과정을 통해 가장 좋은 판단을 내리게 될까? 공론화는 허울 좋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완전한 민주주의로 한발 내딛는 기회가 되는 걸까?   내가 생각할 때 이미 가장 좋은 판단은 “건설 중단”임이 분명하다. 신고리5,6호기는 건설을 중단하고 이어서 탈핵의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라디오포비아를 비판한다”는 어떤 글을 읽었다. 필자인 방사선 산업학회의 모 대학교수는 처음 불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했지만 그것을 잘 다루면서 문명이 발전했으며 불을 무서워하고 멀리한 사람들은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라졌다고 (믿거나말거나 식으로) 이야기한다. 불처럼 잘 다루어서 사용하면 될 핵에너지를 비합리적으로 혐오하고 멀리한다면 우리는 현대문명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겁을 준다. 또한 탈핵 진영은 비과학적·비전문적 무지 속에서 원자력발전을 원자폭탄과 동일시하는 사이비종교집단이라고 비난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누구나 불은 조심해서 다룰 수 있다. 하지만 핵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전문가인 그들보다 핵을 잘 알 수 없는 우리는 그들이 제공하는 핵에너지 서비스는 안전하다고 믿고 따르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방사선 산업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입장에 있는 전문가이긴 하지만, 전문가는 항상 중립적이니 무조건 믿으라는 말인가? 비록 부정부패로 얼룩진 대한민국 관료사회이긴 하지만 원전관련 관료와 전문가들만은 절대 그럴 수 없도록 잘 설계했다는 말도 무조건 믿으라는 말인가? 필자는 “탈원전 정책으로 정전 불안에 떨면서 2만불 시대로 후퇴할 것인지, 전기를 안정적으로 쓰면서도 지구온난화를 막고, 수출을 통해 4만불 시대로 전진할 것인지가 오늘 우리 국민 손에 달려있다”는 말로 다급하게 독자를 종용한다. 그는 방사능 공포를 버리고 못사는 나라 공포를 생각하라고, 수출 4만불과 나의 행복을 동일시하라고, 탈핵미신에서 벗어나 찬핵으로 갈아타라고 독자의 입장전환을 촉구한다. 과연 수출 4만불이 되면 내가 행복해진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이야말로 사이비종교가 아닌가.   공론화를 통한 최선의 선택은 가능할까? 이런 글들이 공론화 위원회 홈페이지를 도배하고 거기에는 지지의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있다. 탈핵릴레이에서 느낀 위기감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게 되었고 공론화에도 회의가 들었다. 최근 확정된 시민참여단의 구성을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해당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권 참여자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 연령별로도 50-60대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핵발전소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 더 오래 신고리5,6호기와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신고리5-6호기와 관련이 먼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고 대중적 홍보도 없이 토론회 등이 진행되고 있다. 공론조사라는 것 자체가 이미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이다. 전기요금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게 문제라고, 편리하게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문제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들어줄까? 심층적 논의 없이,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참여단들의 가치판단 역시 경제적인 것을 넘어 윤리적인 가치에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 정부의 시민참여단에서 배제된 10대로만 구성된 '미래세대 시민참여단'을 통해 실시한 공론조사 결과 (한겨레신문) 나의 스피노자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평범한 사람들이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정치적 과정은 너무나도 요원한 일 아닐까? 이렇게 투덜거리는 사이에 문득 이게 우리의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론화과정이 이 모양, 이 꼴인 것 역시 나의 역량이 여기까지이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높이는 만큼이 내 능력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탈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현재 상태가 내 역량이다. 추석 때 일가친척과 신고리5,6호기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현재 상태가 내 역량이다. 딱 내 역량만큼 우리는 탈핵 쪽으로 갈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나의 최선이고 우리의 최선이다. 만일 이번에 공론화 결과가 건설하자는 쪽으로 나와도, 그래서 탈핵이 아니라 계속 핵발전소를 지어대는 방향으로 가도, 핵폐기물이 계속 쌓여가도, 그러다 끔찍한 재앙이 닥쳐도 그게 우리 능력만큼의 우리의 최선임에 틀림없다. 그러다가 인류가 절멸한다면 그것은 지구로서는 최선의 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역사톡톡] 시즌 10월부터 4개월동안 파지사유 인문학에서는 'n개의 역사'를 탐구합니다. 흔히 서구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오히려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게 합니다. 역사와 이야기, 사실과 상상, 역사와 신화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편 오랜동안 제도권에서 '왕따'를 당했던 '일요일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그동안의 제도사, 연대사, 정치사와 전혀 다른 감각과 방식으로 역사를 탐구합니다. 바로 '심성사(histoire des mentalites)'라는 전대미문의 영역. 그를 통해 그는 탄생, 죽음, 유년기, 가족등과 관련된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태도의 역사를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필립 아리에스의 정반대편에서, 맑스주의적 방법으로 역사연구를 한 홉스봄이 있습니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라는 그의 역사 3부작은 위대한 역사적 유산입니다. 파지사유 인문학 [역사톡톡] 시즌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역사에 대한 메타 질문과 지금-여기-우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놓치지 마세요 10월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이희경(문탁) / 11월: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김혜영(요요) 12월: 헤로도토스 <역사>-박연옥(새털) / 1월 :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이희경(문탁) <아동의 탄생> 필립 아리에스 著 1960년. 프랑스에서는 듣보잡 '바나나 수입업자'가 아동과 가족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는 풍문이 떠돌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세 권의 책을 낸 역사학자였지만 프랑스 아카데미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책 <앙시앙레짐 하에서의 아동과 가족>으로 프랑스 역사학계에 극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일요일의 역사가'로 불리는 필립 아리에스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이고 반동주의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반 일리치, 푸코 등과 같은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들과 깊은 교감을 나눴습니다. 그들은 따로 따로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시대를 연구하고 거의 같은 문제를 파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작업을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 탐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 파지사유 인문학에서는 필립 아리에스 초기의 대표작 <앙시앙레짐 하의 아동과 가족>(번역판 <아동의 탄생>) 을 읽습니다. 푸코라면 고전주의 시대라고 불렀을 앙시앙레짐 하에서 아동과 가족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결과 어떻게 근대학교와 핵가족이 탄생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이는 결코 예쁘거나 귀엽거나 순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학교는 아동을 감금시키는 곳이라는 것, 핵가족은 근대의 게토라는 것. 근대의 최종승리자는 가족주의라는 것!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것. 혹은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 그것을 다시 아리에스를 따라 낱낱이 파헤쳐보겠습니다. 이미 망한(?) 근대 이후의 비전을 탐구하기 위해! 재밌지만 두꺼운, 쉽지만 따끔한, 이 역사책을 한 달 동안 함께 읽고 토론할 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텍스트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문지영 옮김, 새물결) 일정 : 2017년 10월14일부터 4주간 /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12시반 강사 : 이희경 (문탁 / 문탁네트워크 회원) 일정 1강 (10월 14일) 1부 아동기에 대한 인식 2강 (10월 21일) 2부 학교생활 1장~4장 3강 (10월 28일) 2부 학교생활 5장~결론 4강 (11월 4 일) 3부 가족 강의 및 세미나 파지사유 인문학은 강의 + 강사와 질의 응답 + 수강자들의 세미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토론) 로 진행됩니다. 책을 꼼꼼히 읽고 각자 나누고 싶은 질문이나 구절을 정리해 옵니다. (세미나 시간은 수강자들 간의 적극적인 토론과 대화로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 신청방법 1. 댓글로 신청해주세요. 신청사연과 연락처도 남겨주세요. 전화번호 비공개를 원하면 비밀글로 써주세요 2. 회비는 6만원입니다. 입금을 해야 신청이 완료됩니다. (단 복회원인 경우, 복사용을 원하시면 신청할 때 함께 적어주세요.) 문의 : 공일공-9118-하나 둘 팔 삼 (오영)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2 9335 17477 ( 김시연) *문탁네트워크는 영리를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회비는 강의가 시작되면 반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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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⑤] 소통과 혜안, 기대하지 말고 강제하자   글 : 무담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영구 중단할지 재개할지를 묻는 1차 전화 조사가 지난 토요일 종료되었다고 한다. 이제 20,006명의 응답자 중 참여 의사를 밝힌 5,981명 가운데 시민참여단 500명이 선정되어 충분한 정보 및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2차~4차 조사에 응하게 된다. 이 과정을 주관하는 공론화위원회는 10월 20일 공사 중단 또는 공사 재개에 대한 응답 비율을 포함한 최종 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민참여단 형식을 통한 공론화 과정은 정부의 독단과 밀어붙이기에 지친 우리 사회에 신선한 자극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민참여단이나 공론화위원회 모두 결정기구가 아닌 단순 자문기구라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참고해 최종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주체는 어쨌든 중앙 정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난겨울 타오른 촛불에 힘입어 이명박, 박근혜의 암울했던 9년을 떨쳐내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이기에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갖고 공론화 과정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모습을 보면 과연 이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듣는 소통의 정부이며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혜안을 가진 정부인지 걱정하게 된다. 창조과학이라는 과학 아닌 괴담을 신봉하여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말하는 뉴 라이트 성향의 사이비 종교인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지명한 후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티기로 일관하는 자세는 소통의 자세가 아닐뿐더러 산업과 과학에 대한 현 정권의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의 6차 핵실험을 빌미로 기다렸다는 듯 물리력을 동원해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모습에서 소통을 찾을 수 없고 참수부대 창설을 운위하고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 대통령에게 원유공급 차단을 주문하는 등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무참하게 끊어내면서 미국의 눈치만 보는 모습에서 험난한 미래를 헤쳐 갈 혜안을 찾을 수 없으니 이 모든 답답함이 차라리 그저 내가 아둔한 탓에 생긴 몰이해이기를 바랄 뿐이다.        중요한 점은 공론화라는 절차에 혹하여 감시와 압박의 끈을 놓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엄청난 특권과 독점적 이익 속에 몸집을 키워 온 소위 핵 마피아 세력은 온갖 회유와 협박의 논리를 총동원해 시민참여단에 쏟아낼 것이다. 시민참여단의 의견이 압도적 공사 중단이 아닌 팽팽한 모습을 보일 경우 권고에 불과한 이 의견을 묵살하고 공사 재개 쪽으로 정부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집요한 몸부림 또한 이어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핵과 미사일, 그리고 스스로의 인사 헛발길질 탓에 혼란에 빠진 정부가 느닷없이 또 한 번 불통과 어리석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탈핵 이후의 세상에 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신고리 5,6호기의 공사가 영구 중단된다고 해도 핵 문제는 끝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고 원자로가 폐쇄된다 해도 역시 핵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폐로를 식히는 데만 5~15년이 걸리고 완전한 폐로에는 50~10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에게는 상당한 양의 고준위 폐기물 및 중저준위 폐기물이 남는다. 그 동안 원전에서 누려온 작은 이익이 실은 후손에게 빚지는 행위일 뿐이라는 지적이 있었거니와 이제 고리 1호기의 폐로 결정과 함께 정말로 이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우리 앞에 찾아온 것이다. 원전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핵무장에 필요한 플루토늄 확보를 위한 원자로 가동을 평화적 목적으로 치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인류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 방법 개발이라는 어렵고 심각한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룬 채 무작정 원자력 발전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원전 초기의 막연한 기대와 달리 고준위 폐기물의 안전한 처리 방법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우주에 내다 버리자는 제안의 황당함은 챌린저나 콜롬비아 참사로 거듭 확인되었고 고준위 폐기물을 연료 삼아 다시 핵 발전을 하여 쓰레기도 치우고 에너지도 얻는다는 고속증식로의 환상도 이어지는 실패와 사고 속에 일장춘몽이 되었다. 따라서 탈핵은 결코 문제의 해결이자 종료가 아니며 단지 문제의 확대 방지와 뒷감당의 시작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북한 핵과 공존해야 하고 동시에 폐로 및 그 안에 쌓인 방사성 폐기물과도 씨름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평화를 지켜 한반도와 전 세계가 처참한 전쟁터로 변하는 일을 막는 것이며 어떻게든 탈핵을 이루어내고 뒷감당에도 힘써 후쿠시마 같은 더 이상의 원전 사고를 막고 후손에게 물려줄 폐로와 방사성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든지 더 많은 물을 쏟아 붓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정책 당국의 소통과 혜안이 절실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를 정부에 기대하는 자세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촛불역명을 이루어 낸 다중의 지혜를 통해 정책 당국이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강제하고 국민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지혜를 배우게 만들어야 한다. 비록 공론화위원회의 설문 전화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민참여단 참여 기회 역시 사라졌다 해도 시민들끼리의 활발한 공론화는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NM

문탁네트워크에서는 신고리 공론화과정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여, 신고리공론화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공론화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탈원전은 가능할까? 등)에 대해 회원연속칼럼을 게재합니다. (<문탁뉴미디어> 편집자) [신고리5,6호기공론화-연속칼럼➃] 리셋하다, 전환이 시작되었다        글 : 새털 밀양X문탁 인문학 캠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점필재 연구소> 정출헌샘의 강의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나에게는 같은 날 오전에 있었던 손희정 평론가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읽는 이야기책> 강연도 인상 깊었다.손희정샘의 강의는 인문학캠프와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열리는 너른마당의 ‘달공’(한 달에 한 번 공부한다는 뜻의) 프로그램이었다. 금요일 저녁 토론회에서 “문탁 사람들은 너무 공부만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곽빛나씨가, 다음날 아침 손희정샘 강의를 들으러 쪼르륵 달려가기에 나도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우리 보곤 왜 그렇게 공부 많이 하냐고 하면서, 토요일 오전부터 무슨 공부예요?” 나는 곽빛나씨에게 힐난 아닌 힐난을 던졌고, “아! 이건 한 달에 한 번 하는 공부예요!”라고 곽빛나씨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나는 곽빛나씨의 뒤에 앉아 영화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재난과 파국이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지구를 구하는 과학자로 ‘열일’을 했던 1998년의 <아마겟돈>과 봉준호 감독이 백인남성이 아니라 동양인소녀와 흑인소년을 지구의 생존자로 설정한 2013년의 <설국열차>와 문명이 파괴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사냥꾼’으로 살아가는 파국 이후를 다룬 2010년의 <더 로드>까지, 이날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발표된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대표작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강의에서 손희정샘은 두 편의 영화를 꼭 보라 추천했다. 앞에서 언급한 <더 로드>와 2012년에 발표된 <멜랑콜리아>다. 손희정샘은 최근 재난영화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제까지 재난영화들은 어떻게든 파국을 막아내는 방식이었다면,두 편의 영화에서 파국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기정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 지구의 재난과 파국은 미국의 대통령이나 머리 좋은 과학자, 재력 있는 히어로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범주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자행한 ‘사악한 일’들을 생각하면, 지구의 파국을 막아내는 일 자체가 ‘정의’가 아닐 수 있다는 성찰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밀양에서 돌아와 몇 주를 보내고, 몇몇 사이트를 거쳐 맥스무비에서 <멜랑콜리아>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심지어 넷플릭스에도 가입했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매번 회원가입을 하는 번거로움과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다시 인증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보게 된 <멜랑콜리아>는 멋진 영화였다. 지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던 ‘멜랑콜리아’ 행성과 지구는 충돌할 것인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것인가? 영화는 과감하게 지구와 행성의 충돌을 화면으로 담아내고 있다. 위기의 순간을 비명과 화염과 폭발과 함께 표현했던 재난영화의 관습과 결별하며 <멜랑콜리아>는 파국의 순간을 바그너의 음악과 함께 고요히 끝내고 있다.내가 살고 있는 지구의 파괴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그래...지구가 끝장날 수 있구나...세상을 리셋할 수 있구나...이런 생각의 전환과 감수성의 전환을 <멜랑콜리아>는 선취하고 있다. ‘전환’은 쉽지 않다. 습관과 생각과 관습이 바뀐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습관도 생각도 바뀔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느낄 때가 많다. 2014년 문탁에서 76.5일 탈핵릴레이를 시작했을 때, 2015년 광화문에서 녹색당 탈핵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오로지 스마트폰에 장착되어 있었다. 핵발전의 위험, 원자력 신화의 거짓말, 송전탑 때문에 흘린 밀양 할매들의 눈물까지 어느 것 하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전달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전단지를 받고 가방에 넣어버리는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가 벽이었다. 2016년 수지구청 올리브영 앞으로 탈핵집회를 옮겨오면서 동네 노인들이 자주 우리에게 훈수를 두셨다. 훈계와 호통 그리고 “고생한다”는 훈훈한 격려가 뒤섞인 애매모호한 얘기들이 오고갔다. 그리고 대통령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더 자주 피켓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노인뿐 아니라 풋풋한 20대도, 애 키우는 엄마들도,우리 남편 같은 중년의 아저씨들도 피켓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보탠다. 올리브영 앞에서 나는 최근 ‘어떤 변화’를 느낀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하나의 사건이다. 8월 초 갤럽조사에서 계속건설 40%, 건설중단 42% 오차범위 내 근소한 차이로 앞서갔던 반대의견이, 9월 초 조사에서는 계속건설 42% 건설중단 37%로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탈핵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지금은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기사를 인터넷뉴스로 읽으며 ‘지각변동’을 느낀다. 2014년 76.5일 릴레이를 시작할 때, ‘탈핵’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에게 입력이 되지 않았다. ‘탈핵’은 대중적인 용어가 아니니 ‘핵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를 쓰자는 의견이 자주 논의되었다. 이번 공론화과정이 없었다면, 여전히 사람들은 핵발전소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 같다. 고리와 신고리 핵발전소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산과 울산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건설 중인 핵발전소를 멈출 수도 있다는 사실, 국가전력수급계획을 정부와 전문가만이 아니라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사실, 이것들에 대해 필부필부(匹夫匹婦)가 갑론을박(甲論乙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는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