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식의 책읽습니다


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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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1.  

세상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책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면 이 글을 읽는 녀석들’, 즉 수업의 당사자들은 조금 당황스러워 할 것 같다. 겨울 수업에서 이 책은 녀석들에게 썩 호응을 못 받은 쪽에 속했기 때문이다. (아마 소년이 온다쪽이 훨씬 호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비단 그 때 뿐만은 아니다. 그 뒤로도 나는 종종 다른 수업들에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교재로 썼고 대개 꽤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만족스럽진 않았다. 어쩌면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내 인생의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꼽을 테니까. 같은 이유로,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꼽으라 해도 이 책을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채워주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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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의 표지(2002년판)에는 다소 신기한 문구가 적혀있다.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에세이면 에세이지, ‘자전적 역사 에세이는 대관절 무엇일까. 작가인 하워드 진이 역사학자이기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일까.

책을 펼치고 나면 오래지 않아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삶의 궤적을 따라 거슬러 오를 때 우리는 그 모든 순간들에서 역사적 대립과 투쟁의 현장들을 마주한다. 자기 개인의 삶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풍파를 담아낸다는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는 자전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이다. 이 책은 그 풍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한 한 개인의 기록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개인과 세계, 자전과 역사라는 쌍들은 극명하게 반대되는 것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모든 말들에서 인간은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미 바꾸어왔으며 지금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을 발견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서장은 1992년의 한 강의에서 시작한다. 저자인 하워드 진은 그 강의에서 역사학자로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벌인 원주민 학살과, 왜 그러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지, 오늘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역사를 극복하고 평등하고 존엄하게 함께 살아가는 게 가능한지에 대하여 강의했다.

그 강의가 끝나갈 무렵, 한 청중이 그에게 묻는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울한 뉴스들을 생각한다면, 선생님은 놀라울 만치 낙관적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선생님한테 희망을 주는 겁니까?”(10p)

 

진은 독백한다.

 

사람들은 느낌을 존중하지만 그럼에도 이유를 원한다. 계속 나아가야 할 이유, 굴복하지 말아야 할 이유, 개인적 사치나 절망으로 물러서면 안 되는 이유를. 사람들은 내가 말한 인간 행동에서 그러한 가능성의 증거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이유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왔다. 나는 증거가 있다고 믿는다.(22p)

 

이제 그는 그들에게 보여줄 증거를 찾아 자신의 기억을 되짚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1961,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민권 운동이 한창이었던 조지아 주 올버니의 기억이다. 그 때 올버니에서는 기차와 버스에서 흑인과 백인이 나누어 앉는 것에 반대하는 자유승차단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고, 그에 반대하여 수백 명씩 거리로 몰려나온 흑인들도 다시 체포되었다. 진은 그들 자유승차단의 자문위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올버니로 갔다. 그는 올버니에서 마주친 수많은 보통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적었다. 아래는 그 대목의 일부이다.

 

시내버스에서 앞자리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열여덟 살짜리 소녀 올라 메이 쿼터만이 생각난다. 그녀는 올버니의 흑백문화에서 분명히 새로운 언어를 구사했다. “전 빌어먹을 제 돈 20센트를 냈고,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어요.” 그녀는 외설행위로 체포되었다.

찰스 셔로드도 생각난다. 셔로드는 내가 올버니에 도착했을 때 막 감옥에서 나온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가 보안관에게 우리가 지금은 감옥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인간입니다라고 말하자, 보안관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25년 후 보안관은 떠났지만 셔로드는 여전히 올버니를 지키며 농민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있었다)

앨라배마의 걸프 해안 출신으로 그 지역 흑인 운동 조직의 몇 안 되는 비상연락원이자 리노어 테이트를 비롯한 자유승차단과 함께 체포된 밥 젤너도 생각난다. 그들 모두가 교도소에서 나올 때 나도 환영인파에 있었는데, 밥이 그들과 함께 나타나자 보안관이 그를 잡아챘다. “너는 또 다른 건으로 기소가 되었다.” 그는 힐끗 불굴의 미소를 지어 보였고 끌려가면서도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항의행진이 끝나고 시청에서 경찰에게 이름이 적힌 흑인들 중에는 올버니의 소년도 있었다.

너 몇 살이니? 경찰서장이 물었다.

아홉 살이요.”

이름은 뭐지? 서장이 물었다.

소년은 대답했다. “자유Freedom, 자유요.”

집에 가라, 자유야.” 서장의 말이었다.(74-77p 중 일부)

 

또 진은 63년 여름, 미시시피 그린우드,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운동(당시 미시시피 주의 흑인은 전체 인구의 43%였지만 오직 5%만이 유권자 등록을 했고 백인들은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했다)의 기억에 대해서도 썼다. D-Day 바로 전날 밤 활동가들의 비좁은 숙소에는 침대가 모자랐고 망설이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 동네 사람의 주소지 하나를 건넸다. 그는 별 수 없이 그 주소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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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면서 그 집 문을 두드린 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세 시였다.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잠옷 차림이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들어오세요!” 그는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여보, 누가 왔는지 나와서 봐봐.” 불이 켜지고 그의 아내가 나왔다. “우리 친구들, 뭐 좀 차려줄까요?” 우리는 사양하며 깨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빨리 일어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남자가 우리를 위해 매트리스를 끌고 왔다. “, 둘은 매트리스에서 자고 한 명은 소파에서, 작은 간이침대도 있어요.” 동틀 녘에 깨어나 보니 희뿌연 어둠 속에서 친구들이 아직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소리가 들렸고, 부드럽게 되풀이 되는 여자 목소리, 맑은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처음에는 바깥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침실에서 들려왔다. 남자는 벌써 일하러 나갔고 그의 부인이 음조를 넣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오 주여. , 오늘도 모든 일이 잘 되게 하옵시고, 주여, 그들이 보게 하소서, 주여오늘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여, 오랜 시간이었나이다. 오 주여 오 주여, 오 주여 .”

이윽고 우리는 일어났다. 라디오가 댄스음악을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부엌에 불이 켜졌다. 옷을 입으면서 복도 맞은편의 열린 문틈으로 부부의 침실을 보니 침대에 매트리스가 없었다. 자기들 것을 우리에게 내준 것이었다.(108-109p)

 

당신은 어떻게 세상이 바뀌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 보여주기만 한다. 자신이 마주했던 세상과,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그들과 자신이 한 선택과 행동들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그의 대답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다른 학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고 그 책들은 대개 이론과 논리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그쪽이 내게는 훨씬 익숙했다. 하지만 하워드 진은 이론과 논리 대신 자신이 거리와 직장과 구치소와 법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적었다. 또 다른 명성 있는 학자들을 인용하는 대신 내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을 쏟아냈다. 그 이름들은 저명한 운동가의 이름조차 아니었다. 용기 있는 흑인 여학생이나 운동본부 옆집에 살던 부인, 반전운동 중 사망한 여학생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평범한사람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만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던 그 사람들이 그에게 해주었던 말과 보여주었던 행동들을 그는 마치 대학자의 천금 같은 웅변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필사적으로 남기고 있었다.

이 모든 글, 세계의 변화의 개인의 희망에 대한 그의 대답은 학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다. 다른 학자들이 이론과 논리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들의 말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나는 진의 대답에 대하여 그것은 단지 당신 개인의 경험이며, 당신이 운 좋게 만난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일 뿐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침묵하는 사람들과 악화되고 있는 세계의 부정적 측면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의 이유보다 훨씬 더 많은 절망의 이유들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곧 내가 수백 개의 절망할 이유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찾아낸 희망의 이유를 거짓으로 만들 수는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가 나를 비롯한 세상의 변화를 의심하는 이들에게 제시한 건 통계자료가 아니었고, 그는 어떤 진리나 필연성으로 그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아주 적은 가능성과 아주 느린 변화에 대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가 겪은 일들은 분명히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고 그가 만난 사람들도 그러했다. 남은 건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 모든 걸 무의미한 소란으로 흘려보낸 사람들이 있듯이, 그는 단지 진심으로 그 모든 걸 우리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이자 우리가 행동해야 할 이유로 받아들였다.

나는 다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소리 내어 읽었다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의 격변의 순간(그런 순간들을 조심하라!)으로서가 아니라 끝없는 놀람의 연속, 보다 좋은 사회를 향한 지그재그꼴의 움직임으로 오는 것이다 (...)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잔혹함의 역사만이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우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최악의 것들만을 본다면, 그것은 무언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사람들이 훌륭하게 행동한 시대와 장소들 - 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을 기억한다면,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적어도 이 팽이 같은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행동을 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는 현재들의 무한한 연속이며,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현재를 산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승리가 될 수 있다.” (288-289p)


이 마지막 페이지가 그가 자신의 평생의 삶으로부터, 그 자신을 포함한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일궈낸 세상의 작고 느린 변화로부터 이끌어낸 것임을 알았기에. 그것이 그가 가진 희망의 이유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평생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도록 한 힘임을 비로소 알았기에.

그가 보여준소박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또한 얼마나 진실 된 것인가를 깨달았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 책을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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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저 마지막 페이지를 아이들과도 함께 소리 내어 읽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조금 달리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어떻게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노력해봤지만 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이란 테마에 대하여 그 때(지금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 해줄 수 있는 말은 저 마지막 페이지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두에 말했듯 아이들은 적어도 나만큼 저 글에 감명을 받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글쎄.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아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같은 고민이 그리 와 닿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고민을 하기에는 주어진 상황들을 따라가는데 너무 바쁘기도 할 것이고, 세상을 바꾸니 뭐니 하는 이야기에 회의적일 수도 있고, 불안하거나 두려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결국 이 겨울 시즌에 읽은 모든 책들은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기 위한 책들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 일 년 사계절 동안 읽은 모든 책들이 그랬다. 학교, , 마을, 세상에 대한 책들. 그 책들이 자아낸 의문들. 이 일 년 간 우리가 함께 책을 읽으며 품은 모든 의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자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가르친 유일한 것이 바로 그 의심하고 질문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나와 함께 한 책읽기 말고도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시 학교에 갈 것이다. 부모의 다투고, 친구와 놀고, 숙제와 시험과 입시를 걱정하고, 연애하고 알바를 할 것이다. 확신컨대 아이들이 이 시간을 통해 얻은 질문들도 십중팔구는 그러한 각자의 일상 속에 빠르게 잊혀질 것이다. 또한 확신컨대, 언젠가는 그 질문들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삶은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고,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모순을 실감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질문들은 다시 새로운 질문들을 낳는다.

행동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행동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다만 그 때라도 아이들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떠올려주었으면 한다. 적어도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생각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하건 간에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으리란 단정으로 대답을 정하지는 않길 바란다.

 

적어도 쉽게 대답하기 전에 한 번의 망설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리고 내가 고른 책들은 아이들과 함께 한 일 년 동안 우리의 의무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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