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플라톤이 돌아왔다 3회]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싫어해

-국가1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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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현수막을 걸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모월모시 좌회전하는 은색 아반떼와 흰색 소나타 택시의 충돌사고 목격하신 분 연락주세요차가 막히는 도로에서 가끔 이런 현수막을 보게 된다. 정체중인 차량의 행렬을 지켜보다 따분해져 눈을 돌렸을 때, 이런 현수막을 읽게 되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과연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까?’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누가 일부러 자기 시간을 내야 하는 귀찮은 일을 하려 할까?’ 그런데 교통사고의 정도는 어느 정도길래 저렇게 현수막까지 달았을까? 사람이 크게 다쳤나? 피해자가 아이나 어느 집 가장이라면...이렇게 머릿속으로 아침드라마를 찍다, 슬슬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몽상과 잡념은 끝이 난다.

사실 저 위 현수막은 내가 걸었던 현수막의 내용이다. 노면이 살짝 결빙되기 시작하던 12월의 어느 날 자정 가까운 시각, 독서실에서 집으로 오는 아이를 태운 은색 아반떼와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회사원을 태운 택시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은색 아반떼는 좌회전중이었고 택시는 직전중이었다. 두 대 가운데 한 대가 명백히 신호위반을 한 사고였다. 누가 신호위반을 했을까? 택시 운전자는 삿대질을 하며 차에서 내렸고, 은색 아반떼 차량 운전자는 순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경찰서에서 경찰과 운전자들과 보험사 직원이 대면했다. “아줌마, 잘 기억해보세요. 좌회전 신호 맞아요?” “...너무 놀라서 기억이 안나요...근데 아까 거기는 불법좌회선하기 힘든 곳이에요. 지하도로가 있어 도로폭이 엄청 넓어요. 저는 애까지 태우고 오밤중에 신호위반을 할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에요.” 사고 장소는 유명한 포털사이트 본사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야심한 시각 서울번호판을 단 택시들이 한시 빨리 귀가를 희망하는 회사원들을 태우고 신호위반을 밥 먹듯 하는, 그런 위치였다. 그러나 그건 그냥 정황일 뿐이다. 베테랑 택시 기사가 차량이 거의 없는 야밤에 신호위반하는 건 흔하고 흔한 일이지만, 그날 그 시각 그 흔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신호를 지키는 운전 미숙의 운전자가 불법좌회전을 하는 매우 드문 사건이 그날 그 시각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근거 또한 어디에도 없다. 택시 승객은 기사가 신호를 지켰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승객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지 않았을까? 혹은 그들은 택시에서 내리기 전에 기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기로 입을 맞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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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밤 경찰서에서 피곤에 지친 세 남자-경찰, 보험사 직원, 택시 기사와 대치하며 나는 누구도 내 편이 아님을...누구도 사건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경찰은 그저 사건경위서를 작성하면 그만이고, 보험사 직원은 과실여부에 따라 매뉴얼대로 사고처리하면 그만이고, 택시기사는 100% 상대차량 과실을 확신하며 뒷목을 잡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억울함 혹은 불의를 느꼈다. 세 남자가 자기들끼리 꿍짝이 맞아 멋대로 빨리 사건을 끝내버리는 것은 아닐까? “목격자를 찾겠어요!” 새벽 1시 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이었다.

인터넷에서 현수막 업체를 알아보고, 현수막에 사건경위와 담당경찰의 연락처를 적으며, 진짜 목격자를 찾겠다는 기대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억하심정으로 가끔 경찰에게 연락해 제보가 있는지 확인하고, 택시 승객에게 전화해 그날의 기억을 되묻는 껄끄러운 일을 해치웠다. 이제 나는 가끔 도로에서 현수막을 볼 때마다, 그 현수막이 말해주는 것이 억울함의 토로와 그 한풀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날 그 야심한 밤 경찰서에서 세 남자, 경찰, 보험사 직원, 택시 기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내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면 나는 현수막을 내거는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신호위반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아이와 함께 교통사고가 나서 얼이 나가 있는 애엄마에게 보여야 하는 인지상정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신호위반의 진위만 가리면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2. 대화, 소크라테스 철학의 알파(Α)와 오메가(Ω)

그 당시 교통사고 시비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플라톤의 국가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10권으로 구성된 국가의 첫 번째 권의 중심테마는 정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正義)의 정의(定意)이다. 정의사회 구현을 의미하는 사회적 정의를 포함해서 무릇 올바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고대사회의 정의관은 범박하게 말하자면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의미의 인과응보를 달리 말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이익을 준 사람에게는 보답을 하고,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해코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이다. 국가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딴지를 거는 것은 이런 고대사회의 전통 통념에 대한 부분이다.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하는 사람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실제로 우리 생활을 돌아보자. 주차중 옆집 차가 내 차를 긁었다고, 나도 옆집 차를 긁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롭기는커녕 고지식하고 괴팍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그가 내게 손해를 입혔으니, 나에게는 그에게 손해를 입힐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따라서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은 정의(正義)의 정의(定意)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포리아(aporia)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아포리아의 발견에 이르는 공동탐구 과정이 소위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다. TV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네 명의 진행자와 여러 명의 게스트가 등장해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크라테스식의 대화가 아니다. 물론 가끔 그들도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하기도 한다. ‘미담제조기인 어떤 연예인의 선행이 동료 연예인들에게는 결코 미담이 아니라 부담과 괴담이 되는 순간, 스튜디오에는 한순간 정적이 머문다. 연예인의 선행이 사회에 좋은 파장을 준다면, 동업자 연예인인 그들도 선행에 동참해야 한다. 그런데 욕을 좀 먹더라도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라디오스타>의 출연자들뿐 아니라 우리도 무수한 뒷담화 사이, 무의미한 수다 사이 가끔씩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아무 말이나 떠들 수 없는 정적의 순간이 바로 우리가 새로운 앎에 이를 수 있는 쪽문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올바르다고 누군가가 주장하면서, 이 말로써 올바른 사람한테서 적들로서는 해를 입되 친구들로서는 이로움을 입어야 된다는 걸 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한 이가 아닐 것이오. 그 사람은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누구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명백해졌으니 말씀이오.”(1335e)

 

그러니 이제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 상대자들은 정의(正義)에 대한 기존의 정의(定意)를 폐기하고 올바른 정의를 찾기 위해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공동탐구이고, 공동탐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화자들의 동의와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라는 동의와 합의에 이르는 사람들을 소크라테스는 친구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한 줄로 요약하면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당대 아테네 시민 가운데 반쯤은 이런 대화를 즐겼다고 하고, 반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외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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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라시마코스의 반격, “소크라테스선생, 순진한 소리 그만하시오!”

플라톤의 대화편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거부감 중 하나는 이게 과연 올바른 대화인가?’라는 의심이다. 많은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들은 예예, 그렇고 말구요 선생님!”이라고 쉽게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형식상 동의절차를 거친 대화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이 일방통행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들이 모두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것만은 아니다. 국가1권에서 가장 불꽃이 튀기는 순간은 대표적인 소크라테스안티트라마시코스가 등장하는 후반부이다. “소크라테스선생, 순진한 소리 그만하시오! 정의는 강자의 편익에 불과하오.”

이렇게 정의에 대한 논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다라는 전통적인 정의론에서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는 현실주의적 정의론으로 넘어간다. ‘대화의 달인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일격을 가볍게 받아넘긴다. “정의가 강자의 편익이라고? 헐 말도 안 돼!” 강자를 통치자라고 해보자. 통치자의 통치가 피치자가 아니라 치자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의술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를 위한 것이고, 키잡이술은 키잡이가 아니라 배의 운행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의 통치술도 치자(강자)가 아니라 피치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통치술이 치자에게 이익이 아니라 피치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치자들에게 보수와 명예를 준다. 통치술이 피치자가 아니라 치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보수와 명예를 줄 필요가 없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듣고 있으면 트라시마코스는 물론 우리까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이런 답답한 가슴에 소크라테스는 돌 하나를 더 얹어 놓는다. “따라서 트라시마코스가 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이다. 그런데 불의가 이익이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불의가 발생한 곳이 도시든 부족이든 군대든 다른 어떤 단체든, 불의는 첫째, 그 단체가 내분과 다툼에 휘말려 서로 협력할 수 없게 만드네. 둘째, 불의는 그 단체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을 포함하여 자신과 반대되는 모든 것과 원수가 되게 만드네. 그렇지 않은가? (국가1352a)

 

소크라테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불의가 이익이 되는 일을 부지기수로 본다. 최저임금 인상분만큼의 금액을 상여금에서 제외시켜 최저임금 인상의 의미를 무력화시키는 기업의 불의와 골목상권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살 수 없게 만드는 도시재개발 사업자의 불의 등 우리에게는 매일매일의 일용할 불의가 있다. 소크라테스 말대로 불의가 지혜롭지 못하고 불화를 가져올지라도 불의는 힘이 세다. 더 이상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해봐야 입만 아프다고 생각한 트라시마코스는 그렇다고 쳐요.”라고 대화 중단을 선언한다. 국가1권에서 이렇게 싱겁게 트라시마코스가 패배를 인정해버리면, 국가10권까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다. 또 현실성 없어 보이는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트라시마코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주인공 소크라테스를 빛나게 해줄 조연의 등장이 요구된다. 우리는 국가2권에서 소크라테스일병 구하기에 나서는 씬스틸러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활약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 내용은 다음 연재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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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록: 또 다른 저격수 칼리클레스, 그의 화살이 날아간다

 

청소년 시절에 하는 철학활동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사람이 나이가 이미 꽤 들었는데도 계속해서 철학을 하게 되면, 그 일이 웃음거리가 됩니다. 저 역시도 철학을 하는 사람들과 마주하면 웅얼거리고 장난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청소년에게서 철학을 볼 때면 나는 감탄하며 그것이 어울려 보이고 이 사람이 자유인답다고 생각되지만, 철학을 하지 않는 청소년은 자유인답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훌륭한 일이나 고귀한 일을 할 만하다고 여기지 않을 자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러나 나이가 꽤 든 사람이 여전히 철학을 하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걸 볼 때마다. 소크라테스, 이 사람은 당장 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게 성내지 마십시오. 당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니까요. 당신은 물론이고 철학 속으로 계속 멀리 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믿고 있는 바와 같은 그런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당신은 부끄럽게 생각되지 않습니까?(고르기아스486a)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우리는 또 다른 트라시마코스인 칼리클레스를 만날 수 있다. 칼리클레스는 강자가 자기 능력만큼 많은 것을 갖는 것은 자연의 순리만큼 당연한 정의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트라시마코스가 현실적으로 강자의 정의를 말하고 있다면, 칼리클레스는 그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절대화하고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능력이 많다고 많은 것을 갖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변론한다. 예를 들면 뛰어난 제화공이라고 큰 신발을 신지 않는 것처럼, 뛰어난 길쌈장이가 큰 옷감을 두르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강자가 많이 갖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논리지상주의에 칼리클레스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딴청을 피운다. 칼리클레스가 보기에 아테네를 휘어잡을 통치술에 대한 이야기를 늘 제화공과 제빵사의 기술에 빗대어 논리를 전개해가는 소크라테스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철없는 소리나 늘어놓는, ‘노답인생이다.

그런데 이건 소크라테스에게만 해당되는 훈계가 아니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철학 속으로 멀리 질주하는 사람들은 칼리클레스의 팩트폭력에 가슴이 뜨끔하지 않은가? 나는 흠칫 놀라고 등골이 서늘했다. 트라마시코스와 칼리클레스의 직설이 누군가에게 화살을 날린다. 그 화살에 맞아 깊은 내상을 입을 것인가? 여일하게 넘겨버릴 것인가? 나는…….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