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플라톤이 돌아왔다 6회]

그들만이 사는 세상,  SKY캐슬과 '사당동 더하기 25' 

-국가』 4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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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플라톤의 플레이리스트 NO.1 트와이스의 ‘YES or YES’

 

네 마음을 몰라 준비봤어

하나만 선택해 어서 YES or YES?

싫어는 싫어 나 아니면 우리?

선택을 존중해 거절은 거절해

선택지는 하나 자 선택은 네 맘 

 (트와이스의 ‘YES or YES' 가사 일부)

 

지난 글에서는 플라톤의 시대와 혹은 소크라테스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개인과 국가의 감각이 다르다는 점을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갔다. 그럼 2,500년 전의 사람들과 우리의 감각은 어떻게 다른지 그 디테일한 차이를 확인해보자. 오늘날 우리가 개인과 국가 가운데 무엇을 우위에 두어야 할까 선택을 고민한다면, 플라톤에게 이런 고민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니 플라톤에게는 개인 or 국가라는 선택지가 아예 없다. 이건 마치 트와이스의 ‘YES or YES’와 같은 논리이다. 물론 트와이스가 우리에게 ‘YES or YES?’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0.0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YES’를 선택할 것이다(이렇게 매력적인 아이돌의 러브콜을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선택을 존중해 거절은 거절해/ 선택지는 하나 자 선택은 네 맘.” 연애에서 형용모순으로 가득 찬 가사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이댈 만큼 널 사랑해. 그러니 너도 날 사랑해야 해라는 고백에 내포된 역설은 형식상으로만 비논리일 뿐, 내용상으로는 전혀 비논리가 아니다. 연애는 이런 비논리적인 일방통행으로 시작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방통행의 논리가 발견된다.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국가4420b)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생산자들에게는 소유가 허용되지만, 통치자집단인 수호자들에게는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자신의 부와 명성을 자식에게 남겨줄 수 없는 수호자들은 이상국가의 파수꾼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렇게 수호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이상국가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윤리적인 국가구조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칼 포퍼를 위시해, 공사(公私)의 구분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에게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전체주의의 망령이 느껴지는 불의(不義)’로 다가온다.

우리가 부당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희생을 플라톤은 희생이 아니라 자기통치라고 말한다. 각자 자신의 역량을 단련하는 개인이 없다면 국가는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 없다는 개인은 자신의 역량을 단련시킬 장소를 갖지 못한다. 국가 안에서 개인은 자신의 역량을 단련시킬 수 있고, 자기 통치할 수 있는 개인들의 역량이 곧 국가의 역량이 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개인 or 국가의 선택은 상상할 수 없는 선택지이다. 개인은 국가 안에서 성장하고 국가는 개인 없이 존립할 수 없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의 핵심내용이다. 국가와 개인은 전체와 부분의 포함관계일 뿐만 아니라, 서로를 조건 지어주는 상호의존적 관계라는 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인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통념이었다. 고대인들에게 상식이었던 것이 2500년 경과한 뒤의 우리에게는 비상식적이거나 평범하지 않은 사고방식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 폴리스적 동물이 된다.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에서 열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자처했다. 많은 사람들이 벌금형이나 추방형을 권고할 때, 소크라테스는 어떤 타협도 없이 사형을 고집했다. 칠십에 가까운 노년의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이 나고 자란 아테네를 떠나 외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사람’ ‘스파르타사람’ ‘코린토스사람과 같은 분류는 단지 지리적 위치에 따른 구별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포함해 생활양식 전체를 고려한 구별이었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의 장군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제국의 불멸의 부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는 사랑하는 아내나 아들의 이름이 아니라 짧고 굵게 스파르타를 외치고 죽음을 맞는다. 레오니다스에게 스파르타는 그가 사랑한 모든 것들의 총합이었다.

탈조선을 외치며 시급이라도 많이 주는 외국으로 워킹할리데이를 떠나려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고대인들의 폴리스-국가-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폴리스(국가와 공동체)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우리는 어떻게 폴리스적 동물’, 곧 어떻게 정치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준칙처럼 느껴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우리 시대의 정치라 말해야 할까? 혹은 정치의 실종이라고 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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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울(SOUL) 충만한 이상국가, 생산자들의 영혼의 돌봄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국가와 개인의 상호의존적 존재론과 함께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이 영혼의 돌봄이라는 윤리의 문제를 국가정치와 과감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가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안전, 복지, 경제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는 숙고되어야 하는 주요 정책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유일하게 주요하게 다뤄지는 정책은 교육이다. 플라톤은 시민을 스스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으로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 국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힘을 써야 할 유일한 정책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정치공학적이기보다는 교육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철인치자-수호자-생산자의 정치공학적 도식으로 각인되어 있다. 칼 포퍼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플라톤의 이론이 계층 간 이동을 금지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기 쉽다. 플라톤은 정말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힌 편견대마왕일까?

국가가 철인치자-수호자-생산자세 계급에 의해 잘 다스려진 상태를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라고 보았다. 이때 국가는 철인치자의 지혜, 수호자의 용기, 생산자의 절제라는 각각의 미덕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국가의 정의가 지혜-용기-절제에 의해 구현되듯이, 개인의 정의 또한 각자의 지혜-용기-절제에 의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의 구조와 개인의 영혼의 구조의 상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가 정의롭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영혼이 스스로 통치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 이상국가의 마스터키가 된다.

철인치자-수호자-생산자의 사회적 분업이 적절히 구축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영혼의 돌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영혼의 돌봄이 가능할 때, 각자 자신이 맡은 사회적 분업을 이해하고 그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철인이 지혜롭고 수호자가 용기 있어야 한다는 엘리트론으로 독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해에는 생산자들도 지혜롭고 자신의 신념을 보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절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3. 부와 빈곤, 위험한 공존

플라톤은 영혼의 관점에서 정치를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국가의 위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일꾼들을 타락시켜 나쁜 일꾼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공이 부유해지고서도 자기 기술에 여전히 마음을 쓰려고 할 것을 생각되는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이전의 그보다 더 게으르고 무관심해지겠군?”(중략)

정작 그가 가난으로 인해서 자기의 기술과 관련되는 도구나 그 밖의 것을 마련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품들을 더욱 볼품없게 만들어낼 것이며, 또한 자신의 아들들이나 또는 자신이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한결 못한 장인들로 기를 걸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두 가지, 즉 빈곤과 부로 인해서 기술의 산물들도 더욱 못해지지만, 장인들 자신들도 더욱 못해진다네.”

(국가4421d~e)

 

플라톤은 부는 사치와 게으름 및 변혁을 초래하는 것으로, 빈곤은 변혁에 더하여 노예근성과 기량의 떨어뜨림을 초래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수호자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부와 빈곤이 나라 안으로 숨어드는 일이 없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서 감시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곧 생산자들이 절제하지 못할 때, 도래하는 부은 나라의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 위험은 플라톤의 시대로부터 2500년이 경과된 오늘까지 우리의 생활을 위협하는 으로 당당히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플라톤은 크게 성장하는 강대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상정하고 있지 않다. ‘지혜-용기-절제-정의가 조화를 이루는 나라는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강대국이 아니라, ‘하나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규모를 갖는 국가이다. 잉여와 결핍이 없는 적절함이 유지될 수 있는 정도가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규모이다.

그 규모가 얼마일까? 아테네의 번영기 시민이 10만 명이었다고 한다. 시민이 10만 명이라면,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노예를 포함한 전체 인구는 3~40만 명이라고 추정된다. 플라톤은 그 정도의 인구가 파르테논신전에서는 어떤 행사가 치러지고 아고라에서 유행하는 신상품이 무엇인지 뉴스를 공유할 수 있는, 아테네시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동인구가 1천만 명에 이르는 메트로폴리스(대도시)에서는 친구의 것들은 공동”(424a)의 것으로 여겨지는 폴리스의 정치가 구현되지 못한다. 플라톤은 극단적으로 거기엔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두 개의 나라, 즉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자들의 나라가 있”(423a)다라고 말한다. 이해관계가 다른 부자와 가난한 자는 결코 서로를 동료로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를 하나의 나라라고 호명하게 될 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패착을 가져온다. 신자유주의시대,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회적 위기이지만, 그 해법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증세와 감세로 나누어진다. 경기가 불황이라고 모두가 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가부도의 날무수한 중소기업이 도산을 했고, 몇몇 기업은 약탈적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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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들만이 사는 세상, SKY캐슬과 사당동 더하기 25

최근 드라마 ‘SKY캐슬이 화제다. 상위 0.1%의 집안에서 자신들의 직업(의사, 법조인, 교수 등)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넘사벽의 교육열풍을 풍자와 블랙코미디, 범죄스릴러 장르와 결합시켜 매회 자극적인 소재와 이슈를 낳고 있다. 입시 전문 코디의 수십억원대 몸값을 비롯해서, 가정불화마저도 입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상위 0.1%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태도를 일별할 때, 나와 같은 서민들에게 드라마 속 현실은 그들만이 사는 세상처럼 느껴진다. 강남의 학원가에서 그 집 아이와 우리 집 아이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수업을 듣고, 한 날 한 시에 수능시험을 본다고 해도,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우리 집 아이들이 대학을 나오고 정규직이 되어 제 앞가림을 하는 안정된 생활을 소망할 때,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내려오는 자신들의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서 자식대에도 자신들의 성채가 유지되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들의 대물림 구조는 치밀하고 견고하다.

사회학자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2012)에도 견고한 대물림 구조가 기술되고 있다. 1986년 사당동 재개발 사업과 함께 철거가 빈곤가구에 미치는 영향을 사회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조은의 시도는 25년 동안 이어져, 사당동 더하기 25에는 4대에 걸친 빈곤의 대물림이 기록되고 있다. 사당동 철거 후 상계동 임대주택으로 옮겨온 정금순 할머니 가족의 생활은 여전히 사회적 안전망 바깥에 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면 노동력, 주민등록증, 대포 통장은 물론 몸까지……팔 수 있는 건 다 판다. 일수, 외상, 계에서 카드캉, 대포차, 러시앤캐시로 이들의 가난은 더욱 제도화된 금융 자본주의로 편입되었다.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막내 손자는 살 곳을 제공해주는 사람과 주로 연애를 한다. 헤어지는 날은 그에게 곧 방 빼는 날이다. 할머니는 유산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태어난 증손녀를 안타까워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세계화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었다. ‘세계화된 가난또는 가난의 전 지구적 확산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와 임금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 노동의 영향을 받았고 결혼 상대를 찾는 일마저 세계화의 영역 안에 있다. 영세 업체들은 싼 임금을 찾아 모두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 여성을 고용하면서 이윤 남기기를 시도한다. 빈곤층의 남성들은 배우자로 결혼 이주 여성을 맞고 다문화라는 또 다른 빈곤 문화 범주를 추가하고 있다. 금선 할머니 집에도 수일 아저씨와 영주 씨 2대에 걸쳐 다문화 가정을 만들었다. (사당동 더하기 25, 312)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조은의 33년에 걸친 작업은 조만간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33’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부와 빈곤의 견고한 대물림이 일어나고 있는 이곳,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일까? 이곳의 주민이 누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곳에 정의가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없이 정의는 없다고 말한다. 이곳에는 지금 영혼을 돌보는 정치가 부재하다. 플라톤 식으로 혹은 시인 김승일 식으로 말하면 에듀케이션이 없다. 우리의 준칙이 된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이 잔혹한 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국가5권을 이어서 읽어보자.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