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플라톤이 돌아왔다 7회]

미투(MeToo) 없는 이상국가

-국가』 5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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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여가여배’,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

국가5권의 주요내용은 플라톤의 남녀평등설처자공유설, 플라톤의 이론에서 가장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플라톤은 남녀의 성차(性差)에 대해 아이를 생기게 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는 사람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밖의 차이에 대해서는 그것을 성차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구두 장인의 일을 대머리냐 장발이냐 하는 헤어스타일의 차이에 따라 자격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수호자의 자격도 남녀의 성차로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즉 수호자의 자질과 교육에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이상국가에는 여자에게만 차별적인 유리천장은 없다.

 

소크라테스 : 한 여자는 체육에도, 전쟁에도 능하나, 다른 한 여자는 비호전적이고 체육도 싫어하지 않겠는가?”

글라우콘 :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 어떤가? 한 여자는 지혜를 사랑하나, 다른 여자는 지혜를 싫어하겠는가? 또한 한 여자는 격정적이나, 다른 여자는 소심하겠는가?

글라우콘 : 그 또한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까 한 여자는 수호자의 자질도 갖추었으나, 다른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네. 우리가 선발한 수호자다운 남자들의 성향도 이런 게 아니었는가?

글라우콘 : 분명히 그런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므로 여자고 남자고 간에 나라의 수호와 관련해서는 그 성향이 같다네.

(국가 5456a *원문을 대화체으로 변형함)

 

그러므로 여자 수호자들이 체력 단련을 위해 남자 수호자처럼 옷을 벗고 체육 훈련을 받는 것은 추하다는 비웃음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 플라톤은 국가5권에서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시대에도 플라톤의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다. 플라톤이 설계하고 있는 이상국가에는 남녀차별이 없지만, 그 시대에도 현실에서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체육관에서 옷을 벗고 체력 단련하는 일은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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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s://thepin.ch/life/puhRo/trainer-and-me-two-10

 


여가여배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스포츠커뮤니티의 이름이다(여가여배 관련 기사는 독립언론 핀치' https://thepin.ch/life/puhRo/trainer-and-me-two-10 참고). 여자 레슬링을 소재로 한 인도영화 <당갈>을 보고 운동하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친구 두 사람이 여가여배를 기획했다. 1장 주짓수, 2장 농구, 3장 스케이트보드로 진행된 여가여배는 기획자들도 놀랄 만큼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본인들이 여자 사범에게 운동을 배우기 위해 클래스를 열 수 있는 최소인원을 모집하려 시작된 여가여배는 생각보다 빠르게 참가문의가 쇄도했다. 이러한 호응에 기획자 두 사람은 신바람이 났지만 기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여가여배의 흥행성공은 여자들이 마음 편히 운동할 공간이 얼마나 없는지를 여실히 반증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여가여배의 최고의 순간으로 여자 30여명이 동시에 농구공을 튕기던 순간이라고 대답했다. 가끔 여자 한두 명이 끼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체육관, 학교 운동장, 공원의 농구장은 남자들의 성역이었다. 마치 운동장과 스포츠가 남성용 세트인 것처럼. 에어로빅, 수영, 요가, 헬스 등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는 여자가 운동을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인프라는 매우 제한적이다. ‘남성전용이라는 표지가 붙어있지는 않지만, 성장기 여학생이 남자 사범에게 유도와 태권도를 배우는 일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애로사항이 많다.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체육계 미투(MeToo)는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고 국가대표인 여자 선수들이 남자 코치들에게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해왔다는 뉴스는 한국이 얼마나 남성 중심 사회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리트머스종이가 되었다. 여자 선수들이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는 양궁과 탁구와 같은 종목에서도 코치와 감독 등 지도자는 대부분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한국 체육계는 국가대표급 맨스플레인(mansplain)’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2. 플라톤은 페미니스트일까?

25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자가 마음껏 밤거리를 활보하고, 운동을 하고, 지도자가 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에서 보여주는 플라톤의 젠더감수성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플라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에는 머뭇거려지는 점이 많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보여준 그의 젠틀한태도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는 곧바로 없애버리는 것이 공동체 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플라톤에게 장애는 한 개인의 차이특성이 되지 못하고 마땅히 차별 받아야 하는 열등함으로 치부된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살펴보고, 여성이 사회 제도 및 관념에 의해 억압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사회적/정치적 운동과 이론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이를 여성주의로 번역할 수 있지만, 여성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사회 구조적 불합리와 불평등을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소수자의 관점이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에게 그에 따르는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태도는 부당하다. ‘동굴의 우화를 통해 편견에 사로잡힌 사유를 바로잡고자 역설했던 플라톤도 장애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플라톤은 어떻게 여성에게는 차별 없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왜 플라톤은 여자 수호자를 인정할 만큼 여성에게는 수평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일까? 수호자들에게 사유재산을 금지해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윤리적 엘리트가 길러질 수 있다고 생각한 플라톤의 도식을 기억해보자. 처자공유제는 이러한 플라톤의 도식의 다른 표현이다. 자식에게 이름이든 재산이든 물려줄 수 없는 수호자의 세계는 사유가 아닌 공유의 방식으로 꾸려질 수밖에 없다. 자식과 부인도 공유의 대상이 된다. 이때 남매간의 교합이 이루어진다면 인륜에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남매들 간에는 서로의 상대가 되지 않도록 디테일한 조작이 개입되어야 한다. 월드컵 조추첨을 앞두고 골머리를 앓는 피파(FIFA) 관계자만큼 세심하게 리그를 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조작은 조작을 낳는다. 조작은 탁월한 수호자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 결국 탁월한 수호자에 대한 플라톤의 과도한 열정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유전자 맞춤아기와 같은 발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탁월한 수호자의 출산을 위해서는 여자 수호자의 존재는 필수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수평적 인식은 젠더감수성이 아니라 필요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우등과 열등에 대한 선별작업을 인위적으로 도입하겠다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조작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위태롭다. 누군가에게 이 기밀이 누설된다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 비밀경찰이 활약하는 감시국가를 필요로 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추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유토피아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며 당혹스러워진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작업을 철학의 오디세이아라고 명명한 바 있다(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역, 이학사, 2007).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플라톤에게 실망하여 그의 철학을 그로테스크한 유토피아주의로 성급히 봉인하지는 말자. 플라톤의 오디세이아는 아직 항해를 마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남녀평등설과 처자공유설이라는 두 번의 파도를 넘었을 뿐이다. 세 번째 파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3. 독사(doxa)와 대결하는 플라톤과 페미니스트, 벽장을 나오다

플라톤이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에게도 페미니스트와 닮은 구석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는 이거 이상하지 않아?”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많은 남자들이 성범죄 논란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한다.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지는 않다고. 왜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냐고. 그런데 왜 모든 여자는 그런 일을 겪을까? 이 수학적 오차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들이다. “잘 생각해 봐. 네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성희롱이나 데이트폭력이 있는 거 아냐?” 단체톡방에서 장난삼아 오가는 얼평과 애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모두 성범죄다.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 없이 이치를 따져보지 않고 내뱉는 말과 의견을 독사(doxa)’로 부르고 자신의 철학이 대결해야 하는 라이벌로 생각했다.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라고 모두 거짓은 아니다. 독사는 거짓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는 불확실한 진술이라는 점이 독사가 갖는 특징이다. 독사의 한계를 알고, 독사를 사용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독사를 진리로 오인할 때 발생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대부분 독사이다. 이걸 자신의 경험에 의한 제한적인 생각과 말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표현한다면, 편견에 갇힌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요즘은 남자가 더 힘들어. 이득 보는 것도 없고.” “여혐이 남혐 때문에 심해지던데.” “여자는 의무는 피하고 권리만 챙기잖아.”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이 중요한 것 아니야?” ‘아무말대잔치가 펼쳐지는 페미니즘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독사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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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https://tumblbug.com/baumealame4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열풍은 나에게 스펙터클로 다가왔다. 미러링, 미투, 혜화역 집회, 문단 내 성폭력을 폭로한 <참고문헌없음>의 출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나는 구경꾼이거나 방관자의 위치에서 그 주위를 기웃거렸다. 오고가는 말들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상황에 대한 판단이 즉각적으로 서지 않았다. 어느 세대보다 평등하게 아들딸 차별 없는 교육을 받아온 20대들이 남녀불문하고 구세대와 다르지 않은 문법으로 성대결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여자인데 왜 20대 여성들처럼 분노하지 않지?’ 그건 아마도 이성애자 기혼여성으로서 나는 그들만큼 불안하지 않거나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핸드폰을 사용하고, 가는 곳마다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범죄예방은 더욱 어려워진 시대, 반면에 개인정보와 사생활은 너무나 빠르게 SNS에 노출되는 사회. 이러한 기술과 네트워크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세대경험20대 여성들의 공포와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는 간극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결코 모르지 않았던 관행들에 대해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그것이 나에게 올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생존방식이었음을 인정한다. 나에겐 싸움의 기술이 부족했고, 맷집이 없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용어인 커밍아웃은 ‘coming out of cloest’의 줄임말이다. 곧 이성애자인 척 가장하거나 동성애자가 아닌 척 위장했던 벽장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이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한채윤은 나온다는 의미보다 벽장의 의미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권김현영 역, 교양인, 2018) 무엇이 그들을 벽장에 가두었나? 그들을 가둔 벽장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이성애가 정상이고 평범이라는 프레임을 만드는 벽장이다. 그렇다면 벽장을 나오는 일은 동성애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평범하고 무탈한 일상이야말로 퀴어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범죄현장이다. 누군가를 벽장에 가두고 별 일 없이 산다는 것, 평범함에도 독사가 각인되어 있다.

한채윤은 주류사회의 차별시스템은 좀 더 정교해져서 커밍아웃을 인정하고 커버링’(coving)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혼과 입양 제도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사회 통합 시스템에 브레이크를 걸지 말고 조용히 지낼 것을 명령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자임을 티내고 과시하지만 않는다면 묵인하고 넘어가겠다는 논리이다. 나는 커버링이라는 용어에서 남자 선생님-선배-상사-남편으로 둘러싸인 시스템 속에서 그들이 나에게 요구했던 여성성과 그것에 순응한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로테스크한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국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의 현실로 건재하다. 플라톤이 나가려 했던 동굴과 내가 나가려는 벽장은 동일한 독사의 세계이다. 어떻게 탈출할까? 우리가 잠시 잊고 있는 플라톤의 세 번째 파도가 벽장을 탈출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지 모른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