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통신

(70호)파지사유 완전정복 가이드북

2013.10.12 19:47

봄날 조회 수:2000

[작업장통신] 

파지사유있는 것과 없는 것....

[마을공유지 874-6] 완전 정복 가이드북



글 : 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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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북까페, 세미나룸, 회의실, 갤러리, 공연장, 작업실, 청소년까페...매일 또는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이 공간을 뭐라고 부를까? 이 공간을 만드는데 마음과 돈과, 물리적 힘을 보탠 사람들조차도 이 공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우리 마을 공유지를 여는데 오세요.”

“음, 세미나실도 있구요, 커피도 물론 팔구요, 공연도 해요. 화장품 만드는 공간도 있어요.”


애써서 공간의 다양성을 설명하지만 ‘그러니까 거기가 뭐 하는 데냐고...’라고 짧고 굵게 대답하라는 상대방 친구의 전화 목소리에 결국 “그냥 카페예요.”하고 대화를 마치는 일은 한번씩 겪었을 어려움이다. 심지어 한달이 넘는 공사과정을 지켜봤던 근처 세 군대의 카센타 사람들도, 차수리를 맡기러 온 고객한테 이 공간이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지 않는가? 그래.....서 친절한 봄날의 공간 완전정복 가이드북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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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우선 공간의 이름을 보자. 간판에는 <마을공유지 874-6 파지사유>라고 씌여 있다. 대체 무슨 뜻이람? 더구나 한밤중엔 <874-6>이라는 숫자만 불이 들어온다. 숫자에 깊은 의미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눈치빠른 분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 숫자는 다름아닌 이 공간의 번지수이다. 새로 만들어진 공유지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많은 고민이 있었고, 이미 있는, 앞으로 생겨날 수많은 공유지들 중 하나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공간이 터한 위치, 874-6번지를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공유지>는 이 공간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으며 <파지사유>라는 말은 숫자의 차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익숙한 습속과 사유, 근거를 깨고 새로운 실험이 벌어지는 장소로 만들고 싶은 바램을 파지사유(破之思惟, 破之私有, 破之事由....)에 담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공간을 내맘대로 ‘마을공유지’라고 부르거나 ‘8746’으로 부르거나 ‘파지사유’라고 부르면 된다.



파지사유에는 공부방이 있다

나는 공부방이라 부르지만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은 이 방을 ‘세미나룸’으로 부를 것이고 회의를 위해 이 방을 찾은 사람들은 또 ‘회의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파지사유 공간에 있는 두 개의 방은 분리해서 두 개의 방으로도, 가운데 접이문을 터서 하나의 방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어떤 용도이든 미리 예약 후 사용하면 된다. 별도의 이용료는 없으며 인원수만큼 음료를 주문하면 된다. 방이 비었을 때, 굳이 닫힌 공간에서 차를 마시고 싶다는 손님이 있다면 이 방은 또 카페의 연장공간이 된다. 그리고 나의 공부방은 어떤 사람에게는 힐링룸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을 조용히 따로 불러 훈계하는 방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이 방도 어떤 사람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규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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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사유에는 공연무대가 있다

공간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외창이 접이식 폴딩도어가 된 데에는 파지사유가 축제의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날마다 동네 청년들이, 동네 아줌마들이, 혹은 동네 노인들이 음악과 노래와, 차와, 담소로 웃음과 활기가 끊임이 없는 파지사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이 뮤지션이나 배우가 되어 무대를 휘어잡아 봤으면 하는 로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을에 공연무대가 있고, 관객이 있고, 더구나 그 로망을 실현해줄 수 있는 서포터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침 11월중엔 동네 청년들이 준비하는 ‘쪼그만 공연’이 열린다. 생수통이나 혹은 초등학교 때나 두드려봤을 트라이앵글로도 얼마든지 멋진 공연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줄 예정이니 우리는 그저 즐겁게 들어줄 준비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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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사유에는 신용카드가 없다. 대신 신용거래가 있다.

현금 없이도 하루종일 얼마든지 소비할 수 있는 시대이다. 신용카드 한 장만 가지면 교통요금이나 약값도 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지사유에 오면 그 만능의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이 된다. 도대체 장사를 한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신용카드로는 물건을 팔지 않겠다는 건 그 무슨 오만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연유는 이러하다. 

신용카드로 거래를 하면 파지사유에서 신용카드 거래수수료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거래건수가 모이면 상당한 수수료를 물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물건 값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더 따지고 들어가보면 소비자들은 미리 이자를 물고 물건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커피 한잔을 이자를 내고 마신다고? 가당치 않은 일이다. 우리는 파지사유에서 현금으로만 거래를 하는 실험을 하려고 한다. 다소 번거롭겠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에는 신용카드는 제한된 부분에서만 인정되었던 거래형태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럼 당장 돈이 없으면 파지사유에서 커피 한잔을 사마실 수 없단 말인가? 오, 노!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신용’거래를 할 생각이다. 즉 외상장부를 만들어 돈 없이 급할 때 목을 축일 수 있게 하려 한다. 이건 맘씨 좋은 주인장 인심 같지만 ‘외상을 준 것을 고마워하며 전에 마신 커피값과 함께 한 잔 더 마실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놀라운 꼼수가 숨어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글쎄 한번 더 와야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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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사유에는 일회용품이 없다

테이크아웃이 일상화된 것은 신용카드가 그렇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쉽게 플라스틱컵에 커피를 담아 바람 잘드는 야외 벤치에서 친구들과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지만 플라스틱컵이 쓰이면 쓰일수록 그렇게 풍경좋은 야외 벤치는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일상적이라고 여겨지는 편리함에 제동을 걸고, 좀 불편하더라도 어떤 의미를 살려가는 것도 파지사유의 운영방식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손님도 불편할 것이다. 파지사유의 카페매니저들은 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왜 일회용 컵을 안 쓰냐고? 대답 안해도 알 것이다. 이렇게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린 익숙함이라는 근거없는 잣대에 휘둘려온 것은 아닌지 물어보자. 컵뿐만 아니라 파지사유에서는 티슈도 최소한으로 사용하자고 권할 생각이다. 너무 일방적이라고? 너무 불편하다고? 한번 불편해보자고 파지사유는 대답한다. 그럼 정말 나가서 마시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 하지? 손바닥에 부어서 마시나? 그럴 리가 없다. 집에 있는 텀블러나 머그를 가져오면 거기에 담아준다. 심지어 할인도 해준다. 카페매니저를 편하게 해준데 대한 감사라고나 할까. 파지사유의 청년벽화를 담은 멋진 텀블러를 카페안에서 판매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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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사유에는 청소년 우대가 있다.

파지사유는 주말에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동네아지트 여기>로 변신한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는 주로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준비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것이다. 마을에 커피집은 많이 있어도 청소년들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도록 또래들이 많고 음료값이 싸고(파지사유의 모든 메뉴는 청소년에 한해 정액 할인된다. 단, 청소년의 규정은 따로 정한다.) 분위기가 자유로운 곳은 찾기 힘들다. 어른들은 이들이 게임방이나 만화방에 가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그렇다면 이들이 즐거이 찾을 수 있는 곳은 제안하지 못한다. 파지사유가 동네 청소년들이, 동네 청년들이 찾아와 그들만의 이야기, 그들만의 고민, 그들만의 끼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고 이 푸르디 푸른 시간에 기웃거리며 찾아오는 어른이 입장거부되지는 않는다. 단, 그들의 하는 양을 그냥 보기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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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여기까지 얼렁뚱땅 봄날의 파지사유 완전정복 가이드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미 세미오픈한 공간을 둘러본 사람들의 불평이 들린다. 유모차를 끌고 올라갈 방법이 없어 못들어가겠다고 푸념한 젊은 엄마가 있고, 입구의 턱이 언젠가는 큰 사고를 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이 수다에 빠져 애들이 마구 날뛰는 것을 방치하지 않도록, 엄마 반경 1미터 이내로 아이 활동영역을 한정하라고 끈을 제공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기 식탁의자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고 데크에서라도 담배를 피우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애연가들도 있다. 다른 일은 능숙할지 몰라도 카페일은 완전 초보인 카페매니저들의 앞으로의 스트레스도 불보듯 빤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다. 마을공유지라는 이름 그대로 마을 안에서 ‘파지사유’라는 공간을 드나드는 마을사람들이 뜻을 모으면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파지사유라는 공간은 임의로 그 내용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속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천개의 의미로 탈바꿈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 오늘은 어떤 모습의 파지사유가 될지, 모두의 관심 속에 스위치 ON!